영화가 주는 먹먹한 감동을 수치화 한다면, 이 영화는 필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을 것이다. 

영화가 우리의 현실을 이미 반영했기 때문이고, 영화가 우리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먹먹함을 넘어 공포까지 느끼게 된다면 너무 지나친 빈약일까?



영화는 구조적 측면에서 관료주의를, 본질적 측면에서 인간의 자존심을 이야기 한다. 심장병으로 부득이 실업수당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성실한 목수에게 관료 조직은 절망 만을 안겨준다. 신청 절차를 인터넷으로만 받는 공무원에게 시민의 편의는 안중에 없다. 오히려 복잡한 절차를 통해 신청 포기를 유도하는 저의가 숨어 있다. 그런 의도된 불친절에 대항(?)하는 주인공 다니엘(데이브 존스 역)에게 투쟁심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처음에 다니엘은 그런 제도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인터넷 신청을 시도하고, 컴퓨터를 배우고, 이력서 작성하는 강의를 듣고, 그 이력서를 들고 성실하게 동네를 돌았다. 그 성실함에 일자리를 찾기도 했지만, 심장병으로 일 할 수는 없었다. 제도가 개인에게 거짓말쟁이를 강요하는 게 영화 속 현실이다. 



그런 다니엘이 제도에 반항하기 시작했다. 아니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시작했다. 보여주기 위한 증거 수집을 거부하고 수당을 받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 것이다. 대신 그는 낙서를 통해 자신의 뜻을 밝히고 항소를 택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을 아직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보며 비텼다. 


그러나 다니엘에게 허락된 현실은 거기까지였다. 항소 승리를 눈앞에 둔 시점에 그는 심부전으로 죽음을 맞고 만다. 그토록 기다리던 승리가 눈 앞에 있었는데...



영화는 가공의 현실을 반영한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 이루고, 듣고 싶던 말을 영화 속 대사로 위안을 얻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현실을 더 현실감 있게 묘사한 덕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극장 조명이 환하게 켜져도 먹먹함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더 마음이 아픈 건 영국보다 더 한 대한민국의 빈약한 사회보장 현실 때문이다. 영국은 저소득층에게 식료품을 살 수 있게 해주고, 주거비도 지원해준다. 비록 인간의 자존심을 담보로 주는 지원이지만 대한민국에선 들어본 적이 없다. 영하의 추운 날씨만큼 영화의 뒷 맛이 씁쓸하다. 


개인적으로 별 4개 반 주고 싶다. 




LA LA LAND


주변 칭찬이 자자해서 서슴 없이 골랐다. 뭔가 기대엔 못 미쳤지만 그래도 잘 만든 영화라는 데 동의한다.


영화는 배우를 지망하는 여자 주인공 미아(엠마 스톤 역)와 재즈 피아니스트인 남자 주인공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역)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연히 만나 티격태격하며 사랑을 키워간다는 설정은 여느 영화와 비슷하다. 



하지만 다른 영화와 격을 달리 하는 건 기저에 재즈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세바스찬이 미아에게 재즈를 설명하는 장면을 보자. 연주 중간중간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Jam 형식은 뮤지션 간의 대화와 흡사하다고 세바스찬은 말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타협하고 경쟁하는 것이 재즈만의 매력인 셈이다. 사랑도 인생도 그러하다. 자신의 목소리를 타인의 그것과 조화를 이룰 줄 알아야 하며, 불협화음이더라도 서로 부딪혀 가며 낭만을 꽃 피워야 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이별이라 할지라도. 



<라라랜드>는 꿈을 좇고 서로의 꿈이 되어주는 이야기다. 세바스찬의 가난한 뮤지션의 꿈을 미아는 응원해주고, 미아의 무모한 도전을 세바스찬은 아낌 없이 지원해준다. 사랑을 버리고 그 꿈을 이룬 순간, 사랑은 다시 두 사람의 꿈이 되었지만 말이다. 



영화 마지막은 세바스찬의 환상을 보여준다.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현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혼자만의 상상을 해본다. 이 장면은 넣을 필요 없는 영화적 장치였을까? 그렇지 않다. 꿈은 현실이 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일장춘몽 역시 가치있는 꿈이다. 인생 자체가 꿈의 연속이고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서를 혐오하는 나로선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달가울리 없다. 또 그렇고 그런 형태의 자기 계발서이겠거니 싶었다. 그런 시선들을 의식했는지 이 책은 감수의 글 첫 줄에 어설프게 위로하고 뻔한 인생과 꿈을 이야기하는 미국식 혹은 일본식 자기 계발서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언급했다. 게다가 개인 심리학이라고 사전예고를 했다. 최소한 김찬호의 <모멸감>처럼 처럼 감정 사회학이라는 단어로 현혹하진 않았다. 


우선 아들러라는 심리학자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책 표지에 담긴 소개는 아래와 같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로 미래 지향적이고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개인 심리학'을 창시했다. 현대 심리학에 큰 영향을 끼친 알프레드 아들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egmund Freud)나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오늘날 거의 상식처럼 되어버린 프로이트의 원인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사람은 현재의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목적론을 내놓았다. 아들러에 의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에 놓인 문제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즉 자유도 행복도 모두 용기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능력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부른다.


이 책에서 아들러는 우선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개념을 깨버린다. 과거의 경험에 의해 현재 혹은 미래의 삶이 결정되는 것을 무늬만 인과관계라 폄하한다. 돌발적으로 발생한 과거 사건이 현재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있지만, 그 영향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 연계성을 도피처 삼아 현재 삶의 위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가령 어렸을 적 부모에게 학대받은 경험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에 나가기 싫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거 경험을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불행 자랑이라는 개념도 도입된다. 자신의 과거가 불행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불행한 경험을 가진 자신을 주위에서 특별하다고 여기길 바라는 것이다. 결국 불행을 무기로 상대방을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화도 설명되어진다. 누군가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끄집어 냈다는 것이다. 일견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렇게 목적론은 사람들이 목적만 제대로 설정하면 쉽게 인생은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하지만, 이런 목적을 좇는 삶은 끊임 없이 고쳐나가야 하는 고된 작업이 필요하다. 자신의 생활양식을 버리겠다는 결심은 쉽지도 않을 뿐더러 실천은 더욱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불리는 듯 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인생을 심플하게 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욕구를 거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관점과 일치한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과제의 분리를 주장한다. 과제의 분리란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려 그 과제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공부 안하는 아이에게 공부를 주입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듣기에 따라선 극단적이긴 하다. 아들러는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속담으로 방임주의와는 구분한다. 결국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아들러의 주장대로 인정욕구에서 벗어나, 과제의 분리를 실행하면 인간관계는 원만해질 수 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자유나 행복이 아닐까? 그래서 아들러는 진정한 자유에 대해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평가에서 자유로운 삶,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기대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런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행복해지는 첫걸음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공동체와의 조화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개인도 공동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개인 심리학에서 본 타자공헌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이므로, 결국 자신의 행복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드는 의문은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이 구현될 경우 개인은 행복해질 수 있으나 사회적 문제로 인한 불행, 혹은 재화의 유한성으로 인한 충돌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하지만 이는 개인 심리학의 영역을 벗어난다. 적어도 아들러는  심리학, 그 중 개인 심리학에서 펼 수 있는 주장은 모두 편 느낌이다. 책은 선생과 학생의 대화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술술 읽힌다. 특별히 어렵지도 않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뱀발.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다" 이 책의 몇 구절 중 사랑에 대한 언급은 특히 공감이 간다. 상대를 지배하려는 생각이나 불신으로 대하면 어느 것 하나도 사랑으로 이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수직적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아들러이기에 사랑에서도 구속은 그러할 것이다. 아들러다운 생각이다. 



<더 레슬러>, 이 영화는 주인공 미키 루크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다. 미키 루크는 80년대 <나인 하프 위크>의 섹시가이 대명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다. 어둠 속에 얼굴 반이 그림자로 드리워진 그의 입체적인 마스크는 남자가 봐도 멋있었다. 그런 그가 이 영화를 통해 다 늙은, 아니 추하게 구겨진,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줘 충격과 감동을 안겨줬다. 충격이라면 생물학적 노화현상일 것이고, 감동이라면 그럼에도 빛나는 삶에 대한 의지를 말할 것이다. 



영화는 미키 루크의 데칼코마니라 할만큼 그의 삶과 유사하다. 80년대의 레슬링 스타 랜디(미키 루크 역)는 두 삶을 살고 있다. 링 안의 삶과 밖의 삶. 링 안에선 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만, 밖에선 딸로부터 외면 받고, 생활고에 찌들린채, 단골 술집 스트리퍼인 캐시디와의 썸만이 유일한 안식처인 독거남이다. 두 삶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지만, 그는 늘 열정적이면서 본능적으로 돌진한다. 그래서 링 위에 오를 때와 식료품 상점에 출근할 때의 그를 비추는 카메라 워크는 똑같다. 그의 육중한 뒷모습을 따라가며 원테이크로 길게 잡는 신은 몇번을 봐도 종교의식같은 장엄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랜디는 링 안팎의 삶을 전투하 듯 살았을 것이다. 


"링에서 모든 걸 잃었고 모든 걸 얻은 나는 레슬러입니다." 



그런 그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은퇴를 결심하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삶에 변화가 오게 된다. 캐시디의 권유로 딸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캐시디와 진전된 사랑을 시도하고.. 시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남은 건 그저 식료품 상점에서 왕년의 스타가 아닌 점원으로 사는 굴종의 삶. 


하지만 랜디는 그런 삶에 타협하지 않았다. 비록 의사의 경고가 있었지만, 심장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다시 링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다. 캐시디와 함께. 영화의 마지막 신은 랜디가 링 위에서 몸을 날리며 끝난다. 이후 암전은 많은 여운을 준다. 랜디가 승리했을 수도, 심장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커튼 뒤에 숨겨진 결과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랜디는 자기 삶에 대해 늘 솔직하게 살아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모습이 아무리 추하다 하더라도 떳떳할 수 있는 것이다. 미키 루크의 흉한 얼굴을 보고 혹자들은 성형 중독자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난 큰 관심 없다. 내 눈엔 미키 루크의 일그러진 얼굴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앞에 나설 수 있는 용기가 더 도드라지게 보일 뿐이다.


뱀발.

사실 레슬링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스포츠라 생각하지 않았다. 스포츠를 가장한 엔터테인먼트라 여겼다. 그래서 단체명이 WWF가 WWE(entertainment)로 바꿨을 때 솔직한 인정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엔터테인먼트라 할지라도 그 속엔 치열한 삶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평가들의 평점이 높은 영화는 왠지 부담스럽다. 

과연 나도 비평가 수준의 안목을 가졌을까 혹은 비평가들이 좋다고 하니 따분하지 않을까 하는 등의 선입견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

따분하지 않을 만큼 재미 있고, 지루하지 않을 만큼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별 4개 주고 싶다, 아낌없이.



우선 이 영화는 마초적인 냄새가 곳곳에서 짙게 배어난다. 비중있는 캐릭터는 죄다 남자들 뿐이며, 영화를 관통하는 코드는 가족에 대한 남자의 책임감이다. 게다가 총이 등장하고 무대는 텍사스다. 어디선가 말보로 담배를 피우는 카우보이가 튀어나올 듯 하다. 실제로 카우보이 복장을 한 전형적인 텍사스 마초들이 이 영화를 끌고 나간다. 


등장하는 두 인물은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와 형 태너(밴 포스터). 대출금을 갚지 못해 은행에 집과 땅을 넘겨줄 위기에 처한 토비가 출소한 태너와 함께 은행털이를 시작한다.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작은 은행의 지점을 습격하고 큰 돈은 가져가지 않는 수법을 쓴다. 덕분에 연이어 성공하지만, 베테랑 레인저인 마커스를 만나면서 상황은 추격전으로 바뀐다. 다음에 털 것으로 예상되는 은행으로 달려가는 레인저들과 형제는 총격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형 태너는 마커스의 총에 죽고 만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태너의 선택. 동생을 위해 자신이 기꺼이 레인저들을 유인하고 담담하게 최후를 맞는다. 전적으로 동생을 위한 형의 고독한 결정이다. 토비 또한 그러하다. 은행 턴 돈으로 대출금을 모두 갚자 아낌 없이 집과 땅의 명의를 아들에게 돌리고 자신은 그 집을 출퇴근하며 지키는 역할에 만족한다. 이혼했지만, 아들을 위한 아빠의 고독한 결정이다.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남자의 모습이 박물관의 박제처럼 쓸쓸하게 그려진다. 


토비의 대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비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건 아닐런지. "가난은 전염병 같아서 대를 이어 전해지죠. 하지만 내 자식들은 안돼요."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영화에서 꼬집는 미국의 현실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 총기, 추억을 곱씹으며 마을을 지키는 노인들, 그리고 은행과 석유회사라는 거대한 자본에 착취당하는 토착민들의 삶까지 뭔가 황량한 벌판처럼 답답하다. 폴폴 날리는 먼지는 켜켜이 쌓여간다. 저물어가는 미국을 상징한다. 은행털이에 사용했던 차들을 땅속에 묻는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레인저 마커스가 동료 알베르토에게 날리는 인종차별적 농담도 사실 미국 백인의 속내를 대변한다. 도덕적 양심 혹은 어디서든 날아올 수 있는 총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금기어들이 마커스를 통해 쏟아진다. 


며칠 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의 누적된 언행과 경력을 감안할 때 의외의 결과로 여겨지지만, 이 영화의 저변에 깔린 정서를 보면 그릴 놀랄 일도 아니지 싶다.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준 것도, 자존심을 세워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트럼프는 자신들의 정서를 충족시켜 주는 대리인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했을 테다. 아마도 비평가들은 이런 잔잔한 현실 풍자와 서부 영화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높은 점수를 주는 듯 하다. 내 기대와도 크게 어긋나지 않았고. 


이 영화의 원제는 미국의 오늘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Hell or High Water.



막연히 발리를 꿈꿨던 건 제주에서 처음 서핑을 배울 때다. 


잔뜩 구름 낀 아직은 쌀쌀한 오월의 어느 날, 누르스름한 해변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파도가 거의 없는 바다 위에 어설프나마 서프 위에 몸을 띄웠다.  서퍼들은 이런 바다를 장판같다며 재미없어 한다. 하지만 초보로선 용기 낼 수 있는 바다이기도 하다. 그 잔잔한 바다의 파도를 쥐어짜며  파도를 배우다 보니 문득 발리가 떠올랐다. 그래 발리의 꾸따에 한 번 가보자. 



여름 내내 양양이나 제주 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서핑을 배우진 않았다. 서핑에 대한 열망도 며칠 간 식탁 위에 내팽개쳐진 찐빵처럼 식어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발리에 대한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서핑에서 비롯된 발리의 꿈이 서핑이 사라져도 식지 않은 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낙엽이 스산하게 떨어지기 시작하던 시월 어느 날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린 뱃사람처럼 난 발리행 티켓을 끊었다. 


11월의 발리는 우기가 시작된다. 비 따위는 문제되지 않았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볼 것인가가 중요했다. 우선 꼬마곰과 함께 서핑을 하고, 래프팅을 타고, 제트스키나 파라세일링 등을 하리라. 그리고 꼬마곰도 좋아하는 마사지도 받아보리라. 하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 여행은 늘 변덕 심한 사춘기 소녀처럼 꿈틀거렸다. 



먼저 포기해야 했던 건 서핑. 파도가 너무 세서 꼬마곰이 하기엔 위험하단다. 이게 웬말? 서핑 때문에 찾은 발리였는데.. 웬만하면 도전하겠는데 꼬마곰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말에 돌아서고 말았다. 대신 워터붐이라는 워터파크로 행전지를 정했다. 완전히 꼬마곰을 위한 선택이다. 워터붐은 그리 크지 않지만 깔끔하고 붐비지 않아 좋았다. 가장 난이도 높은 것 빼곤 타볼 건 대충 다 타봤다. 그 중 부메랑이라는 슬라이드는 처음에 공포, 그 자체였으나 타고 난 후 별거 아닌 녀석임을 알아차렸다. 꼬마곰과 입에서 단내 나도록 타고 놀았다. 하루 해가 짧았다. 


마사지샵 사장님이 발리에서 가장 만족도 높은 건 래프팅이라 하셨다. 과연 그 말씀은 옳았다. 오지에서 출발하는 래프팅은 강 양쪽으로 솟은 원시림과 그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를 뚫고 가는 코스였다. 이런 그림 같은 풍경은 스위스나 라오스의 그것과 코스의 격을 달리 한다. 그렇다고 한가롭게 풍경을 감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물살이 만만치 않다. 4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코스도 있으니 살짝 무섭기도 하다. 그래도 꼬마곰도 탄 수준이니 그리 겁 먹지 마시라. 마음을 내려놓고 즐기기만 하면 된다. 



대신 파라세일링, 제트스키, 바나나보트 등의 해양 스포츠는 실망스러웠다. 요원들의 안전의식이 희박해 순간 순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 쯤은 즐겨볼 만 하지만 추천하고 싶진 않다. 특히 파라세일링은 보라카이에서와는 달리 시간도 짧고 경치도 멋지지 않았다. 백사장에서 도움닫기를 하는 파라세일링일 줄은 미처 몰랐다. 보라카이의 파란 바다를 가르는 하얀 요트가 몹시도 그리웠다. 



발리는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게 매력이다. 아름다운 발리의 자연을 품고 있는 사원은 때론 수백 미터 절벽 위에, 때론 고즈넉한 숲 속에 수 백년을 웅크리고 똬리 틀고 있다. 사원을 벗어나 도로를 달리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오토바이 부대들을 보게 되고, 우붓시장의 떠들썩한 분위기는 나도 몰래 지갑 속 루피아를 세게 한다. 세미냑의 아기자기한 카페거리에서 맛 본 아이스크림은 동화처럼 달콤했다. 또 산간 지방에 펼쳐진 계단식 논은 어떠한가. 그 가파른 경사의 한 줌 논에 벼를 심고 물을 대는 농부를 보면 손자의 볼을 어루만지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진다. 바다에서 수영하는 아이들, 호텔 수영장에서 만난 스페인 사내들, 바가지 씌울 줄 모르는 솔직한 가이드까지 발리의 얼굴들이 벌써 그립다. 다시 발리에 가고 싶어진다. 한국에 도착한 후 Widarsa와 나눈 카톡을 보니 더욱..


Matur Suksma, Bali. 

감사합니다, 발리. 



앞을 볼 수 없는 늙은 전직 군인 Vs 남자 두명과 여자 한명의 젊은 좀도둑

1:3이 벌이는 육탄전은 보나마나  결과가 뻔해 보인다. 

늙은 맹인이 과연 젊은 세명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러나 공간이 맹인의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화는 디트로이트의 빈 동네에 위치한 맹인의 집을 좀도둑이 털면서 시작한다. 쉽게 털 수 있을 것 같은 빈 집은 맹인이 잠에서 깨어나며 예측할 수 없는 사건으로 치닫는다. 암전이 된 맹인의 집에선 맹인과 정상인의 위치는 바뀌기 마련. 좀도둑들은 앞을 못 봐 허둥대고 맹인은 손바닥 뒤집 듯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는다. 분노한 맹인이 한 명을 죽이고 나머지 두 명을 쫓는 가운데, 맹인과 맹인이 사는 집의 비밀이 한꺼풀씩 벗겨진다. 


맹인이 돈을 숨겼을 거라 예상했던 자물쇠를 채운 방에 좀도둑이 들어서면서 맹인의 정체는 공포로 다가온다. 엄청난 비밀을 가진 거대한 악 앞에 선 좀도둑은 생존에 급격한 위험을 느끼게 되고, 돈을 훔치는 게 아닌 탈출이 절박한 목표가 되고 만다. 영화는 공포 스릴러지만 갑자기 놀라게 하거나 유혈이 낭자하지 않는다.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와 약간의 반전만으로도 스릴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스포일러 조금 가미하고 결말을 밝히면, 선과 악이 따로 없는 주인공들이 어느 정도 타협하며 사건을 마무리 한다. 굳이 권선징악에 매달리지 않는다. 때문에 불편한 사람도 있을 법 하다. 맹인의 돈을 빼앗는 대신 맹인의 과거는 묻어주는 무언의 타협을 하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는 빼앗은 돈을 새로운 세계로 도전하는 주인공의 몫으로 남겨뒀다. 쏟아질 수 있는 비난을 감독이 의식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영화를 탓하고 싶지 않다. 우리 사는 세상이 언제 권선징악이 지배했던 적이 있던가. 타협으로나마 악에 대한 적절한 견제가 주어진다면 그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영화가 씁슬한 게 아니라 이런 사회가 씁쓸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일 뿐.


 


김찬호의 <모멸감>. 


이 책은 제목의 참신성과는 달리 콘텐츠가 많이 부족해 실망했다. (제목에 낚인..?)

굳이 정독하지 않더라도 소제목만 연결해 읽으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잡아챌 수 있지 싶다. 

300 페이지 넘는 분량을 아까운 시간을 들여 소모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선 저자는 1장에서 모멸감의 정의나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케이스에 대해 설명한다. 구구절절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결론은 하나다. 모멸감이란 수치심으로 느낄 수 있는 최악의 단계라는 것. 수치심을 이런 단계로 분류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으나, 그렇다고 단어들의 의미를 모르진 않았다. 저자의 얘기를 세줄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수치심 : 본인의 잘못이나 결함에 대한 타인의 지적을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감정

모욕감 :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분노나 원한을 품을 수 있음)

모멸감 : 모욕과 경멸의 의미가 함께 쓰이는 단어이므로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


사실 이 책을 선택하면서 기대했던 건 표지에 써있던 '감정사회학'이라는 단어였다. 사회적 관점에서 해석되는 개인의 감정이란 대체 뭘까? 개인의 감정을 사회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까? 기존의 책에선 볼 수 없던 거라 몹시 궁금했다. 힐링 따위의 언어유희를 바라진 않았을 터. 그러나 나의 기대는 일단 첫 장에서부터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이어지는 2장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어의 특성상 의태어, 의성어가 많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채롭다, 귀천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다, 신분제가 붕괴되었으나 심리적 의식은 계속되고 있다, 위계서열과 힘의 서열이 극심하다, 공동체가 붕괴된 가운데 집단주의가 엄존한다, 인종주의와 콤플렉스가 있다 등이다. 그런데 드는 의문은 그런 경향은, 여기서 특색이라 하기엔 좀 약하다, 과연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며칠 전 다녀왔던 발리에서 현지인에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Widarsa에 의하면 인도네시아 이름에는 성이 없는 대신 신분을 나타내는 단어가 버젓이 있다고 했다. 이름만 들으면 이 사람의 신분, 성별을 알 수 있단다. 그렇다고 신분을 넘어선 결혼이 금지된 건 아니다. 다만 관행적 계급의식이 이름에 유적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야 말로 신분제의 형식적 붕괴와 의식적 관행이 실재하는 모순이 치열하게 교차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국적 특성으로 모멸감을 해석하려 한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서는 모멸감이 사회적 문제로 더 부각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2장은 한국 이외 케이스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있어야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이 굳이 문화인류학으로 확장되지 않더라도, A를 주장할 때 A의 여집합인 B의 경우는 어떠한지 분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모멸감을 느끼는 상황도 그렇다. 인간이하로 취급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구분 짓거나, 비웃고 깔보거나, 대놓고 혹은 은근히 밀어내거나, 시선의 폭력에서 섣부른 참견까지, 불쌍한 대상으로 못 박거나, 문화의 코드 차이라고 얘기한다. 이 역시 소제목을 나열한 것 이상의 새로운 내용은 없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모멸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뇌의 반응, 호르몬의 분비,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행동패턴 등이다. 모멸감을 둘러싼 정신적 신체적 변화, 사람 간의 변화에 대해 심리학적 혹은 사회학적 의미를 고찰했다면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었을 텐데 실망감만 곱씹어댔다. 표지에서 언급한 '감정사회학'이란 단어는 정작 내용 어디에서도 그 존재가치를 찾을 수 없다. 


4장은 인간적인 사회를 향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3장까지의 내용을 견주어 4장 역시 지고지순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같았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품위를 잃지 않도록, 문제는 감수성이다, 물리적 쾌적함, 생리적 청결함, 화폐의 논리를 넘어선 세계, 소수자들의 연대와 결속, 환대의 시공간 등 소제목 이상의 깊이 있는 분석은 역시 찾기 힘들다. 


더욱 실망스러운 건 결말이다. 생존에서 존엄으로라는 제목의 5장은 어이없이 힐링을 지향하고 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나를 모욕한다 해도, 감정의 주인이 되려면, 행복감은 우월감이 아니며 등으로 문제 해결을 내적 성찰로 성급히 결말 내고 있다. 하긴 저자는 서문에서 모멸에 대한 내성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개인적 수준에서 성찰해야 한다고 못 박긴 했다. 또 "사회나 제도 차원에서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모욕을 전혀 겪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내면이 강해져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진정한 자존감의 문제로 귀결되고 감정의 움직임에 주책없이 끌려다니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회 구조를 개혁하지 않는 선에서 사회 불만을 외면하고픈 전형적인 기득권의 목소리다. 


적어도 이 책은 모멸감을 둘러싼 인간의 반응, 사회적으로 모멸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원인, 계층별로 벌어지는 모멸감의 유형, 그리고 개인의 모멸감을 사회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해결책 등을 논리적으로 주장했어야 했다. 시종일관 '감정사회학'과는 관계 없는 뜬금 없는 결말로 허탈한 웃음과 함께 책을 덮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출판된 수많은 힐링 류의 책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낙오된 시민들에게 힐링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더랬다. 사회 구조적 결함으로 빚어낸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소외를 개인적 명상으로 해결하라는 건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힐링은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때 쓰는 용어일 뿐, 사회적 모순을 잊게 만드는 아편 같은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뱀발.

빅 히스토리를 지향하는 책들은 거시적인 시각으로 미시적인 사건을 덮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은 거시적인 역사적 사건을 미시적인 감정선에 무리하게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보인다. 그런 해석은 정확하지 않을 뿐더러 책의 신뢰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간만에 인상적인 영화를 봤다. 

보는 내내 스토리가 극단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랐는데,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 

어디든 추천할 수 있는 좋은 영화, 러스트 앤 본. 별 4개 반 날리고 싶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가장 빛난 건 스토리다. 역시 탄탄한 원작 소설 덕분이지 않을까. 이 영화엔 진부한 사랑 타령도, 케케묵은 권선징악도, 눈물 콧물 빼는 신파도 없다. 볼 땐 쥐어짜면서도 보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그런 시시한 영화가 아니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의 평범한 이야기로 감동을 빚어냈기에 스토리는 묵직하다. 이런 영화를 사람들은 웰메이드 영화라고 한다. 



우선 남자 주인공 알리. 알리는 아들을 건사하기 위해 클럽의 경호원에서, 마트 노조를 감시하는 불법까지 서슴없는 별 볼 일 없는 삼류인생이다. 여자 주인공 스테파니는 평범한 범고래 조련사다. 그렇고 그런 두 사람이 클럽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스테파니가 공연 도중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하면서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 절망의 끝에서 스테파니가 문득 연락한 남자는 알리. 알리는 스테파니를 무심히 대하지만, 스테파니는 그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 반면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섹스 파트너 이상의 감정은 갖지 않지만, 아들의 사고를 계기로 둘은 사랑의 길을 걷게 된다. 


탄탄한 스토리는 군더더기가 없다는 얘기다. 영화 중간에 나오는 알리와 누나의 관계, 불법 감시로 누나가 실직하게 되고 자기도 직장을 잃게 되는 것 등은 훌륭히 빈 틈을 메워준다.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이야기가 흐르는 것과 어떻게 저렇게 이야기가 흘러가지 하는 차이는 흡입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또 하나 인상적인 건 감독의 연출력이다. 

한 신에서 모든 결과를 보이려 하지 않고 절제해서 영화를 끌고 나가는 힘이 좋다.  결말도 충분히 길게 끌고 나갈 수 있음에도 감독은 굳이 그런 뻔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 듯 짤막하게 주인공들의 삶을 보여줬다. 그래서 여운이 더욱 깊게 남는 것 같다. 특히 손가락 뼈는 다른 뼈와 달리 아물지도 않을 뿐 아니라, 충격이 있을 때마다 고통이 그대로 전해진다는 걸 자막으로 처리한 건 압권이다. 영상을 능가하는 텍스트의 힘이랄까. 감독의 탁월한 연출 덕분에 영화는 <챔프>같은 신파극이 아닌 명작이 될 수 있었다. 



이 책은 어렵다. 

여느 소설책 쯤으로 여기고 달려들었다간 미로 속에 헤매기 쉽다. 

밀란 쿤데라를 소설가가 아닌 철학자로 치고 읽는 편이 낫다는 누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 

정치적인 사건과 사랑이 에피소드가 적절히 교차되는 구조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 하지만 필연성과 우연성으로 겹치게 된다. 
그 교차되는 지점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Einmal ist keinmal"

이 독일 속담은 한번은 중요치 않다. 
한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쿤데라는 책의 초입에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 늘 새로운 것이 반복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 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네 주인공들이 겪는 혹은 선택하는 사건들은 일상의 무의미함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는 가벼움은 또 다시 찾아올 그 무엇인가가 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쿤데라는 모순되는 것들, 특히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에 대한 의견을 밝힌다. 

일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쿤데라는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고 봤다. 

그 짐이 완전히 없어진다면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결국 무의미해진다고도 했다. 

그래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도 가장 미묘하다고 해석하는 듯 하다. 


이 소설에는 네 인물이 등장한다. 

가벼움을 대변하는 토마시와 사비나, 그리고 무거움을 상징하는 테레자와 프란츠. 

이들이 선택한 삶의 궤적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다면 쿤데라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을까.


우선 토마시.

그는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유능한 의사다.  그러나 아내, 아들과의 교류를 끊고, 시국선언 등의 정치적인 사건에 선을 그을 만큼 인생의 무거움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쿤데라가 말하는 가벼움의 대명사. 그를 수식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섹스다. 무수히 많은, 스스로 200명 이상이라고 말하는, 여자들과의 잠자리를 즐겼다. 그에게 섹스는 인간 존재의 자아의 유일성을 찾는 행위다. 그것이 꼭 섹스일 필요는 없지만, 그에겐 섹스 외의 독창성은 공허하고 무의미할 뿐이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이런 토마시도 테레자를 만나 동거하면서 무거움과의 공존이 시작된다. 결혼하고, 의사 타이틀을 내던지고, 유리를 닦기도 하고, 시골에서 트럭도 운전하다, 마침내 테레자의 품 안에서 비로소 영혼의 안식을 찾게 된다. 


그런 토마시에 집착하는 테레자.

테레자는 사랑의 소유를 위해 무거운 삶의 짐을 스스로 짊어지는 운명을 가진 여자다. 테레자를 낳으면서 인생이 망가졌다고 믿는 엄마에게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던 차에 우연히 토마시를 만나게 된다. 행복했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며 일 순간 그 꿈이 이뤄진 듯 했다. 


하지만 토마시의 바람기가 인생에 먹구름이 되었고, 그런 토마시 곁을 떠나지 못하는 테레자는 모진 풍파를 맞아야 했다. 토마시에 대한 실망으로 자살도 생각했지만 끝내 토마시를 버리지 못하는 무거움을 끌어 안는다. 


그리고 토마시의 연인인 사비나. 

사비나는 토마시의 가벼움에 배신이라는 키워드를 덧붙인 인물이다. 토마시와 궁합이 잘 맞아 친구인 듯 연인인 듯 스치듯 가볍게 사랑한다. 


자신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해주는 프란츠를 1그램의 고민도 없이 배신한다. 삶의 무게로부터 주위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그녀만의 방식이다. 가벼워지기 위한 어디론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난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두 사람의 행복했던 말년을 실감한다.


마지막으로 가벼움에 상처 받고 가벼움을 깨닫게 된  프란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비나를 사랑한 남자. 테레자가 삶의 무거움을 짊어지며 토마시를 사랑했다면, 프란츠는 오로지 사랑을 위해 사비나를 갈망한다. 사비나와 관계를 갖지만 마음까지 얻는데 실패한 프란츠는 사비나에 온전히 전념하지 못했던 자신의 탓으로 오해를 한다. 아내를 버리고 사비나에게 가지만 기다리는 건 사비나가 도시를 떠났다는 소식 뿐.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배신에 프란츠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영혼의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반전 의료봉사 간 태국에서 좀도둑에게 칼을 맞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 곁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구분으로 본다면 토마시는 사비나와, 테레자는 프란츠와 만나는 게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한 사건이 반복되어 필연이 되듯 토마시에게는 테레자가 사비나에게는 프란츠가 다가왔다. 어쩌면 빛과 어둠, 두꺼운 것과 얇은 것, 긍정과 부정으로 나뉜 모순이 가장 신비하다는 쿤데라의 말처럼 미묘하게 네명의 이야기는 미묘하게 끝을 맺게 된다. 


다 읽고 난 이후에도 쿤데라가 소설에서 무엇을 의도했을까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어쩌면 이런 모호한 상황을 의도했을 수도 있고, 무한히 반복되는 인생을 하나로 규정하는 게 오히려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현기증에 대한 쿤데라의 정의를 인용해 본다. 


"현기증이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 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