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들의 평점이 높은 영화는 왠지 부담스럽다. 

과연 나도 비평가 수준의 안목을 가졌을까 혹은 비평가들이 좋다고 하니 따분하지 않을까 하는 등의 선입견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

따분하지 않을 만큼 재미 있고, 지루하지 않을 만큼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별 4개 주고 싶다, 아낌없이.



우선 이 영화는 마초적인 냄새가 곳곳에서 짙게 배어난다. 비중있는 캐릭터는 죄다 남자들 뿐이며, 영화를 관통하는 코드는 가족에 대한 남자의 책임감이다. 게다가 총이 등장하고 무대는 텍사스다. 어디선가 말보로 담배를 피우는 카우보이가 튀어나올 듯 하다. 실제로 카우보이 복장을 한 전형적인 텍사스 마초들이 이 영화를 끌고 나간다. 


등장하는 두 인물은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와 형 태너(밴 포스터). 대출금을 갚지 못해 은행에 집과 땅을 넘겨줄 위기에 처한 토비가 출소한 태너와 함께 은행털이를 시작한다.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작은 은행의 지점을 습격하고 큰 돈은 가져가지 않는 수법을 쓴다. 덕분에 연이어 성공하지만, 베테랑 레인저인 마커스를 만나면서 상황은 추격전으로 바뀐다. 다음에 털 것으로 예상되는 은행으로 달려가는 레인저들과 형제는 총격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형 태너는 마커스의 총에 죽고 만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태너의 선택. 동생을 위해 자신이 기꺼이 레인저들을 유인하고 담담하게 최후를 맞는다. 전적으로 동생을 위한 형의 고독한 결정이다. 토비 또한 그러하다. 은행 턴 돈으로 대출금을 모두 갚자 아낌 없이 집과 땅의 명의를 아들에게 돌리고 자신은 그 집을 출퇴근하며 지키는 역할에 만족한다. 이혼했지만, 아들을 위한 아빠의 고독한 결정이다.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남자의 모습이 박물관의 박제처럼 쓸쓸하게 그려진다. 


토비의 대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비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건 아닐런지. "가난은 전염병 같아서 대를 이어 전해지죠. 하지만 내 자식들은 안돼요."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영화에서 꼬집는 미국의 현실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 총기, 추억을 곱씹으며 마을을 지키는 노인들, 그리고 은행과 석유회사라는 거대한 자본에 착취당하는 토착민들의 삶까지 뭔가 황량한 벌판처럼 답답하다. 폴폴 날리는 먼지는 켜켜이 쌓여간다. 저물어가는 미국을 상징한다. 은행털이에 사용했던 차들을 땅속에 묻는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레인저 마커스가 동료 알베르토에게 날리는 인종차별적 농담도 사실 미국 백인의 속내를 대변한다. 도덕적 양심 혹은 어디서든 날아올 수 있는 총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금기어들이 마커스를 통해 쏟아진다. 


며칠 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의 누적된 언행과 경력을 감안할 때 의외의 결과로 여겨지지만, 이 영화의 저변에 깔린 정서를 보면 그릴 놀랄 일도 아니지 싶다.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준 것도, 자존심을 세워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트럼프는 자신들의 정서를 충족시켜 주는 대리인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했을 테다. 아마도 비평가들은 이런 잔잔한 현실 풍자와 서부 영화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높은 점수를 주는 듯 하다. 내 기대와도 크게 어긋나지 않았고. 


이 영화의 원제는 미국의 오늘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Hell or High Wate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