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견해는 많다. 

종교적 혹은 물질론에 입각해 해석하기도 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받아들이기도 증명하기도 어려운 죽음을 티벳불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매우 궁금했다. 


티벳불교의 죽음은 우선 혼과 신체가 분리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종교의 특성이다. 생명의 시작은 빛이고 빛이 꺼지면서 죽음이 시작된다고 본다. 이 경계에 혼불이 있으며 혼불이 신처에서 빠져나가면서 사후세계는 펼쳐진다. 이 때 근본 빛을 깨닫거나 포와(의식 전의)에 성공하면 빛과 화합한 사자의 의식이 중유(바르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장 정수리를 통과하면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며, 이것이 니르바나(대자유)라고 <티벳 사자의 서>는 말한다. 


죽음의 순간에 해탈하지 못하고 카르마에 따라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면서도 본성을 찾지 못한 영혼은 환생의 길로 접어든다고 본다. 결국 티벳 불교는 환생을 하지 않는 것이 죽음을 임하는 자가 지녀야 할 목표이며, 이를 잊지 않도록 죽음의 순간에서 사후 49일(바르도) 동안 끊임 없이 사자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티벳 사자의 서>인 셈이다. 윤회는 곧 무량한 고통이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빙의란 카르마에 휘둘려 구천을 떠돌던 바르도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 것으로 해석한다. 그럴 듯 하다. 


사후세계인 바르도 동안 여러 경험을 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부터 3~4일간인 치카이 바르도에는 무의식 상태에 머무르고, 초에니 바르도에 이르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고, 이 시기에 다양한 신을 만나게 된다. 17일이 지난 후 맞이하는 시드파 바르도에서는 34일까지 잠깐 평온과 기쁨을 찾게 되며, 해탈과 윤회 사이에 최종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티벳불교가 이해하는 죽음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영혼과 신체가 분리된다는 전제부터 그렇다. 설사 분리된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객체일 뿐이라 생각한다.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얘기할 수는 있으나 증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기에 죽음에 관한 다양한 담론은 끊임 없는 관심 대상이다. 


지인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읽게 된 <7년의 밤>은 마치 영화를 보 듯 숨가쁘게 읽혀진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가 서술하느냐에 따라 긴장감은 이렇게 달라진다. 

작가의 필력 덕분이다. 


이 책은 어느 날 밤 일어난 사고 혹은 살인이 불러온 나비효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다들 if를 달고 후회하지 않을까 싶다. 이왕 엎어진 물은 담을 수 없는 법.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은 각자의 계산에 따라 행동한다. 생존을 위해 벌이는 두뇌게임 같다. 그러나 두뇌게임을 할 만큼 영리하지 않은 캐릭터도 있다. 아들을 향한 아빠의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 하지만 그 어떤 힘보다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눈길이 가는 인물은 아들 서원이다. 서원은 이름보다 살인자의 아들로 사회에서 기억된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자연스럽게(?) 부당한 주변의 냉대와 대우를 받고 있다. 심리적 연좌제의 적용 대상인 셈이다. 


문명화될 수록 죄에 대한 벌과 범죄자에 대한 처리방식은 응징에서 교화로 바뀌어 간다. 연좌제도 제도적으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규범적 연좌제의 소멸과 달리 심리적 연좌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 악령처럼 남아 있다.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어떤 심리적 신체적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면죄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그들을 안아줄 수 있을 만한 포용력이 없다. 


유사한 책이 있다. 1999년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2명의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가 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이다. 놀랍게도 가해자의 엄마는 사고 당시의 집에서 계속 살고 있다. 이웃이 가해자의 범죄가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인식했고 그녀를 포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수 클리볼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교 역할을 하고 공감의 힘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단다. 미국이 처음부터 이런 케이스를 만든 건 아니다.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책을 보면 저자 잭 이브라힘 역시 <7년의 밤> 서원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주위의 냉대는 물론 폭력에 시달렸고, 20번 넘는 이사를 해야 했다. 개명까지 했다. 90년 11월 메이르 카하네 암살사건의 범인 엘사이드 노사이르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불과 10년의 갭을 두고 미국 사회는 포용의 힘을 키운 것이다. 


<7년의 밤>의 서원을 보며 우리 사회가 언제쯤 편견 없이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올지 궁금했다. 건강한 신체는 무균실이 아닌 세균에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눈길도 안주는 책이 있다면 자기계발 관련 책이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자기 발전의 한계를 사회제도가 아닌 개인 탓으로 돌리고 경쟁사회에서의 승리를 지고지선임을 맹목적으로 주입한다. 이 논리에 빠지면 개인은 체제에 순응하게 되고, 사회는 기득권층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자기계발서와 비교할 순 없지만, 자기성찰 도서 역시 광의의 이데올로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경쟁을 똟어낸 성취만큼 이나 욕심버리기를 통한 안분지족 역시 특정 사고방식을 주입하는데 익숙하다. 힐링이 결국 외부가 아닌 내면세계에 집중하여 온갖 시름에서 벗어나자는 것 아닌가. 둘 간의 차이는 기득권층 이익에 얼마나 봉사하느냐 여부다. 과거 법가, 유가, 도가 등 집권층의 권력유지 이론이 피지배계층의 생활 철학으로 자리잡은 것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를 통합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 책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는 '욕망의 자유'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욕망의 자유, 즉 선택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저자인 아잔 브라흐마라가 불교 승려임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무언지 아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라깡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내 욕망의 실체를 정확히 안다면 그 욕망을 내려놓을 필요도 욕망에 집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다시 말하면 죽기 전에 진정한 자기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인간은 노력하고 발전한다.


저자는 개별 사례들을 나열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은 벽돌에 관한 이야기다. 집을 만들 때 벽돌 2 개를 잘 못 쌓아 매번 무너뜨릴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제자리에 잘 쌓여진 998개의 벽돌에 주목하라고 하니, 그 집이 다시 보이더란다. 


"물론 내 눈에는 잘못 놓인 2 장의 벽돌이 보입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쌓아 올린 998개의 벽돌들도 보입니다." 


이 깨달음에서 많은 것이 떠올랐다. 부분적인 허물에 집착해 전체적인 장점에 소홀했던 어리석음에서 앞으로 잘 못 쌓을지 모를 두려움까지 모두 훌훌 털어버려야 하지 않을까. 


자기성찰서는 내면에 존재하나 평소 깨닫지 못했던 가치를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이다. 사회의 변혁을 이끄는 이데올로기와 동행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앙상블을 이룰 것이다. 간디가 그러했 듯이.


뱀발. 류시화 시인이 번역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던 건 사랑에 대한 정의다. 내게 사랑이란 단어는 타인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기에, 작가가 주장하는 논지에 쉽게 동의되지 않았다. 머릿 속으로는 이해갈 듯 하나, 가슴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가는 사랑의 원초적인 의미인 에로스를 사회적 시각으로 해석한 듯 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두 개인 사이의 가벼운 계약관계가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경험"


에로스에 대한 정의다. 어렵다. 또 하나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세계를 돈으로 규격화시키기에 '동일성의 지옥'이라 표현하고 동시에 사랑의 주체들을 나르시시즘의 함정에 빠뜨린다고 본다. 돈은 새로운 경계를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하기 때문이다." 


결국 타자성이란 게 사랑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데, 자본주의 질서가 타자성을 방해하고 사랑이 꽃필 수 없는 곳으로 만든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돌이켜 보면 신자유주의의 양극화 현상이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대중들이 생업에 쫓겨 각박한 감정의 사회가 되고, 금전적 잣대로 개개인을 평가하는 사회이긴 하다. 그래서 결혼율이나 출산율이 저하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로스가 종말되었다는 주장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과거 지금보다 더 살기 힘들었던 시대에도 분명 사랑은 존재했고, 앞으로도 자본주의가 심화된다 한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종말의 길을 걸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에 대한 정의가 작가와 나 사이 간극이 크다고 봐야 한다. 만약 작가가 규정하는 사랑을 인간관계로 치환한다면, 나로선 읽기 수월해진다. 왜냐하면 사회구조의 빈화방향을 봤을 때 인간관계가 점점 사막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선 구조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해석하는 게 맞는지부터 이견이 달린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을 개인 감정의 영역으로 남겨뒀다. 본능적 감정이 아닌 후천적 학습으로 체득되어지는 사랑은 사회구조적인 영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이 책은 사랑보단 사회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타자성을 증발시킨 나머지 사랑의 행위마저 금전적 가치로 매기는 건 낯설지 않다. 이 책에서 예로 든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드는 궁금증 하나. 왜 굳이 번역의 형식을 띠었을까? 독일어로 초판을 찍었다 해도 저자가 한국어로도 출판할 수 있었을 텐데.. 



여행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야만 하는 책. 


이 책은 여행작가가 무엇이고, 되기 위해선 무얼 준비해야 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선 무얼 버텨내야 하는가 알 려준다. 한 마디로 여행작가를 꿈꾸기는 쉬워도 따라하기는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 실제 여행작가의 지극히 현실적인 얘기라 설득력이 남다르다. 그래서 이 책은 읽기에 따라 여행작가의 꿈을 키울 수도 깨뜨릴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작가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여행작가는 책만으론 밥 먹기 힘들단다. 여행도 자비로 갔다 와야 하기에 ROI를 맞추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뭔가 스폰서가 있을 법하지만, 그런 건 가물에 통나듯 하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공짜밥은 없다는 게 이 바닥 생리다. 여행지건 호텔이건 홍보는 필수고 책에 광고라도 한 장 삽입해야 한다. 그냥 속 편하게 자기 돈을 먼저 때려박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기 돈 들여 써낸 컨텐츠가 활자화된 책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또 얼만가. 책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인세로 통장잔고에 찍히는 건 생각만큼 크지 않단다. 따라서 강연 등의 부업을 해야 하며 그마저 없을 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 노마드의 삶이 초원이 뒤덮인 여름엔 배를 채울 수 있지만, 눈으로 가득한 겨울엔 무조건 버텨내야 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보면, 여행작가란 직업은 매력적이긴 한가 보다.


가슴에 콕 박혔던 글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1. 우선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써봐라. 책 한 권은 폰트 10 크기로 A4 50장 정도다

2. 글을 썼으면 묵혀라. 시간이 지난 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 퇴고를 해라. 

3. 사진을 스토리와 디테일이 살아있게 잘 찍어야 한다. 메시지의 힘은 글보다 사진이 클 수 있다.

4 카메라는 가급적 좋은 걸 써라. 

5. 책을 내기 위해선 완성원고를 쓰고 기획서를 출판사에 보내 협의한다. 

6. 사진을 잘 찍으려면 우선 노출, 초점, 균형을 맞춰라. 피사체 외 잡스러운 것은 치워라. 

7. 블로그, 트위터 등 SNS를 잘 활용하자. 단 블로그는 이미지와 글이 7:3 글이 많아야 5:5가 되는 게 중요하다. 



한 분야에 가(家)를 이룬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치열한 투쟁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오랜 세월을 지켜왔다는 자체가 그에게 보통 사람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바둑에 대한 호감과 함께 삶에 대한 자세를 배울 수 있게 한다. 


조훈현은 바둑을 두 듯 인생을 살고, 바둑의 판세를 읽 듯 인생을 해석한다. 그게 옳던 그르던 그는 그렇게 살았고, 그 선택의 축적분이 지금의 그다. 한 때 온라인 바둑게임 사업을 하면서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그 길이 바둑 저변 확대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온갖 비난에도 떳떳할 수 있었다. 비록 사업은 실패해서 결과적으로 악수를 둔 셈이지만, 인생에선 악수인 걸 알면서도 둬야 한다고 주잔항다. 오히려 그는 나이 어린 친구들이 하기엔 비난이 더 커지고, 나이가 든 사람이 하기엔 부담스러우니 자신이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까지 보였다. 어쨌든 그 진정성은 책에서 충분히 느껴졌다. 


한 가지 공감했던 건 삶의 자세에 대한 조언이다. 매너는 가르칠 수 있지만, 인품은 못 가르친다는 것, 가르치려 덤비는 순간 망가질 수 있기에 그저 모범이 되라는 얘기는 새겨둘 만한 교훈이다. 누구나 알지만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반면 알파고와 같은 AI에 대해서 오판한 면이 있다. 아무리 기보를 외워도 고수는 사고의 깊이가 있기에 한 순간에 승부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디 오판이 조훈현만의 생각이었을까. 그렇게 이세돌의 패배는 전 국민의 충격이었다. 


번외로 바둑을 모르는 나로선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유창혁의 바둑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바둑류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건 인생과 비슷해서 일 것이다. 천재형과 노력형, 공격형과 수비형 등 자신의 스타일을 대입해 응원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조훈현은 그런 면에서 내가 선호했던 기사는 아니었다. 된장국 냄새 나는 서봉수를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책에선 두 사람이 사석에서 피하는 사이라는 게 의외기도 하고, 한편 이해되기도 한다. 그만큼 치열한 승부를 했을 테니 말이다. 



“10만 년 전 지구상에는 최소 여섯 가지 인간 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존재하는 종은 하나뿐이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


이 책에는 빅 히스토리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각이 담겨있다. 인지혁명에서 농업혁명, 과학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각각 인간이 똑똑해지고, 자연을 길들이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신의 영역에 진입한 것으로 해석했다.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 등과 함께 동시대에 경쟁 혹은 공존하며 살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박물관에선 유인원에서 직립 인간까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진화론으로 오해하게금 전시를 해왔다. 학교에서도 비슷하게 배웠더랬다. 앞으론 좀 더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흥미로웠던 건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과 동시대에 치열하게 다투면서도 성관계를 하기도 했다는 점. 그 결과로 인종에 따라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의 DNA 비율이 다르다는 것은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식민지 시대 인종 개량론이나 청소론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사피엔스가 진격한 대륙마다 거대동물과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등이 멸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사피엔스는 생태계의 블랙홀같은 존재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연쇄살인마일 테고.


반면 이 책은 빅 히스토리에 집중하다 보니 미시적인 관점에 소홀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식민지 수탈을 기반으로 제국의 번영했다는 사실을 하나의 팩트일 뿐 교훈의 대상으로 삼진 않는다. 오히려 제국주의를 역사 발전과정의 불가피한 측면으로 해석한다. 그런 관점은 하나의 시각으로서 존중할 순 있지만, 식민지를 경험했던 민족의 일원으로서 불편하다.


결과적으로 농업혁명이 사피엔스를 정착하게 했지만, 삶의 질은 수렵시대의 그것에 비해 나아지지 않았다고 하라리는 봤다. 사피엔스의 신체구조가 농사를 하기엔 부적합하며, 특정 작물을 경작하는 사피엔스의 경우 흉작일 때 굶을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설명이다. 이는 과학혁명 이후에도 적용되어, 종의 번성과는 별개로 인간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개인의 영역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런 류의 결론은 허무하다 못해 슬프다. 언제까지 행복은 현실에 만족해야 얻어지는 개인의 몫이어야 할까. 


또한 수렵시대와 농업혁명 이후의 사피엔스의 행복치를 비교하는 게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건 아닌지도 의문스럽다. 어쨌든 사피엔스는 외부 세계의 위협을 끊임없이 제거해왔고 개인 역량과 상관없이 종의 힘에 기대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특정 개인의 케이스로 시대를 정의하는 건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토론거리를 제공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에 빠졌던 종교시대의 사피엔스가 무지를 인정한 순간 과학혁명을 열 수 있었다. 제국의 이익을 위해 과학은 밀착되었고, 그 혁명이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그 결과 인류는 동일한 역사권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신이 되려는 사피엔스의 종말을 예감한다. 알파고로 대변되는 AI의 활돔범위가 확장을 거듭하다 결국 인류의 의식을 대신하지 않을까 하는 그 불길한 예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류 멸방 시나리오로 4 가지를 꼽았다. 핵전쟁, 지구 온난화, 바이러스, 로봇이 그것. 이중 3개는 인류가 만들어낸 창조물이고 1개는 영향을 끼친 자연현상이다. 결국 사피엔스는 하늘을 날다 떨어지는 이카루스의 전철을 밟는 건 아닐까.



저자에 대한 사전정보가 전혀 없던 내게 다른 사람들의 극렬한 반응은 놀라웠다. 책모임 사람들 중 일부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저자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 저자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들어보니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직접 접하지 않는 상태에서 남의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진 않는다. 그리고 내겐 저자의 과거보단 책 내용에 집중하고 싶었다. 


저자는 굳이 산문집이라고 주장한다. 소설이라고 해도 좋으련만 소설이라고 하기엔 논픽션의 요소가 많아서 그런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 역시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어쨌든 운문이 아니라는 면에서 산문집이라고 한 들 틀린 말은 아니다. 


산문은 주인공의 자잘한 일상을 영화 보듯 보여준다. 이혼남과 이혼녀가 만나는 일상은 그리 로맨틱하지 않다. 현실과 뒤엉킨 에피소드들은 구질구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묘사가 외려 더 오래 잔상에 남는 법. 픽션과 논픽션의 절묘한 줄타기로 독자에게 공감을 얻는 게 저자가 노린 점이 아닐까 싶다.


산문에 등장하는 장소는 실명을 써서 그런지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광화문 교보문고는 개인적으로 자주 가는 곳이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자의 의도가 소설이 아닌 산문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읽으면서 내내 머릿 속을 맴돌았던 생각은 이게 논픽션일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논픽션이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스포일러 하나. 

산문의 맨 마지막 장,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건  좋은 선택이라 보여진다. 그게 픽션이건 아니건 간에.



이 책은 회사에 두고 짬 날때마다 읽었다. 하루에 몇 십장을 읽을 때도 있었고, 며칠간 한 장 못 넘길 때도 있었다. 단숨에 읽어내진 않아선지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에도 앞의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앞의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책은 결말만으로도 훌륭하다. 내가 이해하는 셸리 케이건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두번째 유사영생의 길, 즉 내 사후에도 존재할 의미있는 성취를 일궈낸 삶이 의미있는 삶이다. 


셸리 케이건은 죽음에 대해 얘기하지만, 사실 이 책은 삶에 대한 책이다. 죽음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배경으로, 혹은 막연한 두려움으로 죽음을 대하고 그에 맞춘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죽음은 삶을 대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케이건은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밝힌다. 자신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방식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점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간접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말하지만, 논리적으로 합당하기에 다른 어떤 주장보다 강력하다. 그래서 이 책은 꼭 죽음에 대한 얘기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논리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다. 공포는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는 달라진다. 이 책은 영혼의 존재를 따지면서 시작한다. 영혼이란 있을까? 인간을 영적 존재로 보는 이원론자는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혹은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반면 일원론자는 영혼은 있을 수 있으나 육체의 부분이라 주장한다. 


케이건은 일원론의 입장에서 이원론을 공격한다. 물리적 관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기 어려우며, 영혼이나 전생이 있다 해도 육체에서 비롯된 기억이 없다면 현재 살아있는 자신과 어떤 연관관계도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사후세계는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육체가 생체기능을 중지하는 순간 영혼은 사라지는 것이며, 정신과 영혼 모두 육체에서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인간을 육체, 인격, 영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인격의 종말을 죽음으로 정의한다면 인격이 사라지고 영혼만 윤회하는 불교, 힌두교, 등의 환생논리 역시 결국 육체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라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결국 나와 연관된 기억, 욕구 등을 포함한 인격이 사라진 채 영혼만이 영생을 한다면 영생한다한들 현재의 나와는 어떤 연결고리도 찾기 어렵다. 


갑자기 영화 <메트릭스>가 떠올랐다. <메트릭스>에서는 타인의 경험을 다운로드해 더 강력한 파워를 장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무술을 고수처럼 하게 되고, 헬기를 조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적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쉽지 않은 얘기다. 다운로드하는 매뉴얼은 누군가의 육체를 기반으로 수련된 결과물이므로 신체조건이 다른 타인에게 맞을리 없다. 물론 이식할 수 있다는 전제 또한 검증된 바 없다. 이런 면에서 정신, 그리고 나아가 영혼 역시 육체와 유기되어 생각하긴 어렵지 않을까?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케이건은 우선 죽음이 나쁜가 질문부터 던진다. 죽음이 나쁜 건 내가 삶에서 누리고 있는 좋은 것들을 잃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생은 좋은 것일까? 삶이 괴로운데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이를 논의하기 위해 케이건은 그릇이론을 들고 나온다. 삶을 그릇이라 가정할 때 나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담아 그 총합이 플러스인가 마이너스인가를 계산해 삶을 평가한다. 지극히 수학적인 방식이지만 이해하기엔 편하다. 플러스인 인생에선 영생이 축복이지만, 마이너스가 지속되는 인생에서 영생은 저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이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여부는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이 지점부터 케이건은 삶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고픈 이야기를 여기에 담았다고 본다. 죽음은 삶에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필연성, 가변성, 예측불가성, 편재성 등 죽음의 특성이 결국 삶을 아름다고 가치있게 만들어준다는 주장이다. 이런 삶과 죽음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삶을 더욱 활기차게 가꾸어 줄 수 있기에 우리는 삶을 좀 더 성찰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의 서두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다. 케이건이 보는 가치있는 삶이란 내 사후에도 존재할 의미있는 성취를 일궈낸 삶이 의미있는 삶이다. 후대에도 계속 언급될 생명력을 지닌 자신의 성취물이 있다면 그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얘기다. 충분히 가슴에 새겨볼 만한 논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비록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성취물 없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 관련한 따뜻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회자된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참고로 케이건은 민감한 문제인 자살도 이야기한다. 죽는 게 더 나은 삶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는 합리성과 도덕성이라는 두가지 관점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케이건은 합리성과 도덕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런 삶이 존재할 수 있으나, 자살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살요인이 그 순간 대단한 것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확률 또한 크기 때문이다. 대단히 용기있는 주장이다. 도덕적으로 자살을 터부시하는 맹목성이야말로 인간의 합리적인 선택 자체를 박탈하는 건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케이건은 종교적 관점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신이 부여한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을 신의 뜻에 대한 거역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신이 부여한 생명을 연장시키는 의료행위 또한 거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성경에 씌여있기 때문에 자살을 죄악시하는 것 또한 신화적인 믿음에 가깝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얘기도 있지만, 지금 그것을 지켜야할 금기로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케이건이 주장하는  것처럼 삶을 단순히 계량화할 수는 없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다르고 추구하는 목적 또한 다르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기까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꼭 후대에 남길 성취물이 있어야만 의미있는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안빈낙도와 가정의 평화를 위한 삶 또한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글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게 지도와 나침반이듯이,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하고 싶다면 죽음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에게 피할 수 없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권할 만 하다.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는 알려진대로 폴 고갱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갱의 작품은 쉽게 접하면서도 그의 삶에 대해선 그리 알려진게 없는데, 이 소설을 읽어보면 고갱이란 작가의 면모를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다. 


프랑스 출신의 고갱은 소설속에서 런던 출신의 증권 중개인 스트릭랜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평범한 삶을 살았던 스트릭랜드가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떠나면서, 소설은 추리소설같은 미궁 속으로 빠진다. 도대체 왜 그가 안빈낙도를 버리고 파리로 떠났는지 주변 사람들은 온갖 억측으로 추리해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맞히지 못한다. 단순하게도 그는 정말 그림을 위해 파리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47세의 나이로 말이다.  


빈 손으로 떠난 스트릭랜드는 파리에서 생활고를 겪는다.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작가로서의 꿈을 차근히 준비한 그는 작품활동에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주변을 고려하지 않는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이 기피하는 인물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몇 사람만큼은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헌신적인 도움을 준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더크 스트로브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단 화가인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빨리 캐치했다. 그에게 스트릭랜드의 예술작품은 분명 존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트로브의 예술적 빈곤함을 알아 챈 스트릭랜드는 그를 철저히 홀대했고, 그럼에도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를 숭상했다. 그런 나머지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 아내인 블란치마저 빼앗기고 블란치도 스트릭랜드의 버림을 받아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이쯤에서 책이 시작할 무렵 글을 다시 되새겨 보자. 책에는 지위가 아닌 인간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스트릭랜드라고 규정했다. 아마도 서머셋 몸은 스트릭랜드의 예술을 향한 불같은 집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열정을 형상화한 것이 달(Moon)이었을 테고, 그에 반해 세속적인 가치가 6펜스짜리 은화였을 것이다. 결국 타히티 섬에까지 가서 자신의 예술적 노력을 바쳐 불멸의 작품을 남긴 스트릭랜드의 불꽃같은 예술정신은 인류 역사에 길이 길이 남았다. 


하지만 그의 집념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의 발현에 불과하다. 그 끝이 비록 가치있는 결론을 낳았다 할지라도, 그는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배신했으며, 철저히 주변 사람을 이용했다. 의도했건 아니건 결과적으론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셈이다. 다른 게 있다면 그는 정말 순수한 예술정신을 지녔고, 또 그만큼 자신을 학대했을 뿐이다. 나쁜 남자와 비견된다. 그에 비하면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는 참으로 인간미 넘치는 나쁜 남자였다. 그는 적어도 남을 위해 눈물 흘렸던 마음을 지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나쁜 남자둘에게는 여자를 끄는 마력이 있는 듯 하다. 파리에서도 타히티 섬에서도 스트릭랜드는 여자들의 관심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난 주변에서 스트릭랜드와 유사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예술적 소양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그런 주변 파괴적인 인격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불처럼 화려하지만 모든 걸 집어 삼키는 사람 보다 흘러가는 물처럼 주변과 융화하는 사람이 더 좋지 않을까? 조르바도 부담스럽지만 스트릭랜드는 사절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