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어렵다. 

여느 소설책 쯤으로 여기고 달려들었다간 미로 속에 헤매기 쉽다. 

밀란 쿤데라를 소설가가 아닌 철학자로 치고 읽는 편이 낫다는 누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 

정치적인 사건과 사랑이 에피소드가 적절히 교차되는 구조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 하지만 필연성과 우연성으로 겹치게 된다. 
그 교차되는 지점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Einmal ist keinmal"

이 독일 속담은 한번은 중요치 않다. 
한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쿤데라는 책의 초입에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 늘 새로운 것이 반복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 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네 주인공들이 겪는 혹은 선택하는 사건들은 일상의 무의미함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는 가벼움은 또 다시 찾아올 그 무엇인가가 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쿤데라는 모순되는 것들, 특히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에 대한 의견을 밝힌다. 

일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쿤데라는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고 봤다. 

그 짐이 완전히 없어진다면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결국 무의미해진다고도 했다. 

그래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도 가장 미묘하다고 해석하는 듯 하다. 


이 소설에는 네 인물이 등장한다. 

가벼움을 대변하는 토마시와 사비나, 그리고 무거움을 상징하는 테레자와 프란츠. 

이들이 선택한 삶의 궤적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다면 쿤데라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을까.


우선 토마시.

그는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유능한 의사다.  그러나 아내, 아들과의 교류를 끊고, 시국선언 등의 정치적인 사건에 선을 그을 만큼 인생의 무거움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쿤데라가 말하는 가벼움의 대명사. 그를 수식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섹스다. 무수히 많은, 스스로 200명 이상이라고 말하는, 여자들과의 잠자리를 즐겼다. 그에게 섹스는 인간 존재의 자아의 유일성을 찾는 행위다. 그것이 꼭 섹스일 필요는 없지만, 그에겐 섹스 외의 독창성은 공허하고 무의미할 뿐이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이런 토마시도 테레자를 만나 동거하면서 무거움과의 공존이 시작된다. 결혼하고, 의사 타이틀을 내던지고, 유리를 닦기도 하고, 시골에서 트럭도 운전하다, 마침내 테레자의 품 안에서 비로소 영혼의 안식을 찾게 된다. 


그런 토마시에 집착하는 테레자.

테레자는 사랑의 소유를 위해 무거운 삶의 짐을 스스로 짊어지는 운명을 가진 여자다. 테레자를 낳으면서 인생이 망가졌다고 믿는 엄마에게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던 차에 우연히 토마시를 만나게 된다. 행복했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며 일 순간 그 꿈이 이뤄진 듯 했다. 


하지만 토마시의 바람기가 인생에 먹구름이 되었고, 그런 토마시 곁을 떠나지 못하는 테레자는 모진 풍파를 맞아야 했다. 토마시에 대한 실망으로 자살도 생각했지만 끝내 토마시를 버리지 못하는 무거움을 끌어 안는다. 


그리고 토마시의 연인인 사비나. 

사비나는 토마시의 가벼움에 배신이라는 키워드를 덧붙인 인물이다. 토마시와 궁합이 잘 맞아 친구인 듯 연인인 듯 스치듯 가볍게 사랑한다. 


자신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해주는 프란츠를 1그램의 고민도 없이 배신한다. 삶의 무게로부터 주위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그녀만의 방식이다. 가벼워지기 위한 어디론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난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두 사람의 행복했던 말년을 실감한다.


마지막으로 가벼움에 상처 받고 가벼움을 깨닫게 된  프란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비나를 사랑한 남자. 테레자가 삶의 무거움을 짊어지며 토마시를 사랑했다면, 프란츠는 오로지 사랑을 위해 사비나를 갈망한다. 사비나와 관계를 갖지만 마음까지 얻는데 실패한 프란츠는 사비나에 온전히 전념하지 못했던 자신의 탓으로 오해를 한다. 아내를 버리고 사비나에게 가지만 기다리는 건 사비나가 도시를 떠났다는 소식 뿐.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배신에 프란츠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영혼의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반전 의료봉사 간 태국에서 좀도둑에게 칼을 맞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 곁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구분으로 본다면 토마시는 사비나와, 테레자는 프란츠와 만나는 게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한 사건이 반복되어 필연이 되듯 토마시에게는 테레자가 사비나에게는 프란츠가 다가왔다. 어쩌면 빛과 어둠, 두꺼운 것과 얇은 것, 긍정과 부정으로 나뉜 모순이 가장 신비하다는 쿤데라의 말처럼 미묘하게 네명의 이야기는 미묘하게 끝을 맺게 된다. 


다 읽고 난 이후에도 쿤데라가 소설에서 무엇을 의도했을까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어쩌면 이런 모호한 상황을 의도했을 수도 있고, 무한히 반복되는 인생을 하나로 규정하는 게 오히려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현기증에 대한 쿤데라의 정의를 인용해 본다. 


"현기증이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 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죽음에 대한 견해는 많다. 

종교적 혹은 물질론에 입각해 해석하기도 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받아들이기도 증명하기도 어려운 죽음을 티벳불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매우 궁금했다. 


티벳불교의 죽음은 우선 혼과 신체가 분리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종교의 특성이다. 생명의 시작은 빛이고 빛이 꺼지면서 죽음이 시작된다고 본다. 이 경계에 혼불이 있으며 혼불이 신처에서 빠져나가면서 사후세계는 펼쳐진다. 이 때 근본 빛을 깨닫거나 포와(의식 전의)에 성공하면 빛과 화합한 사자의 의식이 중유(바르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장 정수리를 통과하면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며, 이것이 니르바나(대자유)라고 <티벳 사자의 서>는 말한다. 


죽음의 순간에 해탈하지 못하고 카르마에 따라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면서도 본성을 찾지 못한 영혼은 환생의 길로 접어든다고 본다. 결국 티벳 불교는 환생을 하지 않는 것이 죽음을 임하는 자가 지녀야 할 목표이며, 이를 잊지 않도록 죽음의 순간에서 사후 49일(바르도) 동안 끊임 없이 사자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티벳 사자의 서>인 셈이다. 윤회는 곧 무량한 고통이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빙의란 카르마에 휘둘려 구천을 떠돌던 바르도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 것으로 해석한다. 그럴 듯 하다. 


사후세계인 바르도 동안 여러 경험을 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부터 3~4일간인 치카이 바르도에는 무의식 상태에 머무르고, 초에니 바르도에 이르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고, 이 시기에 다양한 신을 만나게 된다. 17일이 지난 후 맞이하는 시드파 바르도에서는 34일까지 잠깐 평온과 기쁨을 찾게 되며, 해탈과 윤회 사이에 최종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티벳불교가 이해하는 죽음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영혼과 신체가 분리된다는 전제부터 그렇다. 설사 분리된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객체일 뿐이라 생각한다.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얘기할 수는 있으나 증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기에 죽음에 관한 다양한 담론은 끊임 없는 관심 대상이다. 


지인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읽게 된 <7년의 밤>은 마치 영화를 보 듯 숨가쁘게 읽혀진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가 서술하느냐에 따라 긴장감은 이렇게 달라진다. 

작가의 필력 덕분이다. 


이 책은 어느 날 밤 일어난 사고 혹은 살인이 불러온 나비효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다들 if를 달고 후회하지 않을까 싶다. 이왕 엎어진 물은 담을 수 없는 법.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은 각자의 계산에 따라 행동한다. 생존을 위해 벌이는 두뇌게임 같다. 그러나 두뇌게임을 할 만큼 영리하지 않은 캐릭터도 있다. 아들을 향한 아빠의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 하지만 그 어떤 힘보다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눈길이 가는 인물은 아들 서원이다. 서원은 이름보다 살인자의 아들로 사회에서 기억된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자연스럽게(?) 부당한 주변의 냉대와 대우를 받고 있다. 심리적 연좌제의 적용 대상인 셈이다. 


문명화될 수록 죄에 대한 벌과 범죄자에 대한 처리방식은 응징에서 교화로 바뀌어 간다. 연좌제도 제도적으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규범적 연좌제의 소멸과 달리 심리적 연좌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 악령처럼 남아 있다.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어떤 심리적 신체적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면죄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그들을 안아줄 수 있을 만한 포용력이 없다. 


유사한 책이 있다. 1999년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2명의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가 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이다. 놀랍게도 가해자의 엄마는 사고 당시의 집에서 계속 살고 있다. 이웃이 가해자의 범죄가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인식했고 그녀를 포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수 클리볼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교 역할을 하고 공감의 힘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단다. 미국이 처음부터 이런 케이스를 만든 건 아니다.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책을 보면 저자 잭 이브라힘 역시 <7년의 밤> 서원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주위의 냉대는 물론 폭력에 시달렸고, 20번 넘는 이사를 해야 했다. 개명까지 했다. 90년 11월 메이르 카하네 암살사건의 범인 엘사이드 노사이르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불과 10년의 갭을 두고 미국 사회는 포용의 힘을 키운 것이다. 


<7년의 밤>의 서원을 보며 우리 사회가 언제쯤 편견 없이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올지 궁금했다. 건강한 신체는 무균실이 아닌 세균에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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