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읽게 된 <7년의 밤>은 마치 영화를 보 듯 숨가쁘게 읽혀진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가 서술하느냐에 따라 긴장감은 이렇게 달라진다. 

작가의 필력 덕분이다. 


이 책은 어느 날 밤 일어난 사고 혹은 살인이 불러온 나비효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다들 if를 달고 후회하지 않을까 싶다. 이왕 엎어진 물은 담을 수 없는 법.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은 각자의 계산에 따라 행동한다. 생존을 위해 벌이는 두뇌게임 같다. 그러나 두뇌게임을 할 만큼 영리하지 않은 캐릭터도 있다. 아들을 향한 아빠의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 하지만 그 어떤 힘보다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눈길이 가는 인물은 아들 서원이다. 서원은 이름보다 살인자의 아들로 사회에서 기억된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자연스럽게(?) 부당한 주변의 냉대와 대우를 받고 있다. 심리적 연좌제의 적용 대상인 셈이다. 


문명화될 수록 죄에 대한 벌과 범죄자에 대한 처리방식은 응징에서 교화로 바뀌어 간다. 연좌제도 제도적으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규범적 연좌제의 소멸과 달리 심리적 연좌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 악령처럼 남아 있다.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어떤 심리적 신체적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면죄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그들을 안아줄 수 있을 만한 포용력이 없다. 


유사한 책이 있다. 1999년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2명의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가 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이다. 놀랍게도 가해자의 엄마는 사고 당시의 집에서 계속 살고 있다. 이웃이 가해자의 범죄가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인식했고 그녀를 포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수 클리볼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교 역할을 하고 공감의 힘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단다. 미국이 처음부터 이런 케이스를 만든 건 아니다.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책을 보면 저자 잭 이브라힘 역시 <7년의 밤> 서원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주위의 냉대는 물론 폭력에 시달렸고, 20번 넘는 이사를 해야 했다. 개명까지 했다. 90년 11월 메이르 카하네 암살사건의 범인 엘사이드 노사이르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불과 10년의 갭을 두고 미국 사회는 포용의 힘을 키운 것이다. 


<7년의 밤>의 서원을 보며 우리 사회가 언제쯤 편견 없이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올지 궁금했다. 건강한 신체는 무균실이 아닌 세균에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