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에 가(家)를 이룬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치열한 투쟁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오랜 세월을 지켜왔다는 자체가 그에게 보통 사람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바둑에 대한 호감과 함께 삶에 대한 자세를 배울 수 있게 한다. 


조훈현은 바둑을 두 듯 인생을 살고, 바둑의 판세를 읽 듯 인생을 해석한다. 그게 옳던 그르던 그는 그렇게 살았고, 그 선택의 축적분이 지금의 그다. 한 때 온라인 바둑게임 사업을 하면서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그 길이 바둑 저변 확대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온갖 비난에도 떳떳할 수 있었다. 비록 사업은 실패해서 결과적으로 악수를 둔 셈이지만, 인생에선 악수인 걸 알면서도 둬야 한다고 주잔항다. 오히려 그는 나이 어린 친구들이 하기엔 비난이 더 커지고, 나이가 든 사람이 하기엔 부담스러우니 자신이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까지 보였다. 어쨌든 그 진정성은 책에서 충분히 느껴졌다. 


한 가지 공감했던 건 삶의 자세에 대한 조언이다. 매너는 가르칠 수 있지만, 인품은 못 가르친다는 것, 가르치려 덤비는 순간 망가질 수 있기에 그저 모범이 되라는 얘기는 새겨둘 만한 교훈이다. 누구나 알지만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반면 알파고와 같은 AI에 대해서 오판한 면이 있다. 아무리 기보를 외워도 고수는 사고의 깊이가 있기에 한 순간에 승부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디 오판이 조훈현만의 생각이었을까. 그렇게 이세돌의 패배는 전 국민의 충격이었다. 


번외로 바둑을 모르는 나로선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유창혁의 바둑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바둑류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건 인생과 비슷해서 일 것이다. 천재형과 노력형, 공격형과 수비형 등 자신의 스타일을 대입해 응원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조훈현은 그런 면에서 내가 선호했던 기사는 아니었다. 된장국 냄새 나는 서봉수를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책에선 두 사람이 사석에서 피하는 사이라는 게 의외기도 하고, 한편 이해되기도 한다. 그만큼 치열한 승부를 했을 테니 말이다. 



“10만 년 전 지구상에는 최소 여섯 가지 인간 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존재하는 종은 하나뿐이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


이 책에는 빅 히스토리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각이 담겨있다. 인지혁명에서 농업혁명, 과학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각각 인간이 똑똑해지고, 자연을 길들이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신의 영역에 진입한 것으로 해석했다.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 등과 함께 동시대에 경쟁 혹은 공존하며 살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박물관에선 유인원에서 직립 인간까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진화론으로 오해하게금 전시를 해왔다. 학교에서도 비슷하게 배웠더랬다. 앞으론 좀 더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흥미로웠던 건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과 동시대에 치열하게 다투면서도 성관계를 하기도 했다는 점. 그 결과로 인종에 따라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의 DNA 비율이 다르다는 것은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식민지 시대 인종 개량론이나 청소론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사피엔스가 진격한 대륙마다 거대동물과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등이 멸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사피엔스는 생태계의 블랙홀같은 존재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연쇄살인마일 테고.


반면 이 책은 빅 히스토리에 집중하다 보니 미시적인 관점에 소홀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식민지 수탈을 기반으로 제국의 번영했다는 사실을 하나의 팩트일 뿐 교훈의 대상으로 삼진 않는다. 오히려 제국주의를 역사 발전과정의 불가피한 측면으로 해석한다. 그런 관점은 하나의 시각으로서 존중할 순 있지만, 식민지를 경험했던 민족의 일원으로서 불편하다.


결과적으로 농업혁명이 사피엔스를 정착하게 했지만, 삶의 질은 수렵시대의 그것에 비해 나아지지 않았다고 하라리는 봤다. 사피엔스의 신체구조가 농사를 하기엔 부적합하며, 특정 작물을 경작하는 사피엔스의 경우 흉작일 때 굶을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설명이다. 이는 과학혁명 이후에도 적용되어, 종의 번성과는 별개로 인간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개인의 영역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런 류의 결론은 허무하다 못해 슬프다. 언제까지 행복은 현실에 만족해야 얻어지는 개인의 몫이어야 할까. 


또한 수렵시대와 농업혁명 이후의 사피엔스의 행복치를 비교하는 게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건 아닌지도 의문스럽다. 어쨌든 사피엔스는 외부 세계의 위협을 끊임없이 제거해왔고 개인 역량과 상관없이 종의 힘에 기대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특정 개인의 케이스로 시대를 정의하는 건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토론거리를 제공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에 빠졌던 종교시대의 사피엔스가 무지를 인정한 순간 과학혁명을 열 수 있었다. 제국의 이익을 위해 과학은 밀착되었고, 그 혁명이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그 결과 인류는 동일한 역사권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신이 되려는 사피엔스의 종말을 예감한다. 알파고로 대변되는 AI의 활돔범위가 확장을 거듭하다 결국 인류의 의식을 대신하지 않을까 하는 그 불길한 예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류 멸방 시나리오로 4 가지를 꼽았다. 핵전쟁, 지구 온난화, 바이러스, 로봇이 그것. 이중 3개는 인류가 만들어낸 창조물이고 1개는 영향을 끼친 자연현상이다. 결국 사피엔스는 하늘을 날다 떨어지는 이카루스의 전철을 밟는 건 아닐까.



저자에 대한 사전정보가 전혀 없던 내게 다른 사람들의 극렬한 반응은 놀라웠다. 책모임 사람들 중 일부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저자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 저자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들어보니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직접 접하지 않는 상태에서 남의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진 않는다. 그리고 내겐 저자의 과거보단 책 내용에 집중하고 싶었다. 


저자는 굳이 산문집이라고 주장한다. 소설이라고 해도 좋으련만 소설이라고 하기엔 논픽션의 요소가 많아서 그런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 역시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어쨌든 운문이 아니라는 면에서 산문집이라고 한 들 틀린 말은 아니다. 


산문은 주인공의 자잘한 일상을 영화 보듯 보여준다. 이혼남과 이혼녀가 만나는 일상은 그리 로맨틱하지 않다. 현실과 뒤엉킨 에피소드들은 구질구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묘사가 외려 더 오래 잔상에 남는 법. 픽션과 논픽션의 절묘한 줄타기로 독자에게 공감을 얻는 게 저자가 노린 점이 아닐까 싶다.


산문에 등장하는 장소는 실명을 써서 그런지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광화문 교보문고는 개인적으로 자주 가는 곳이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자의 의도가 소설이 아닌 산문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읽으면서 내내 머릿 속을 맴돌았던 생각은 이게 논픽션일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논픽션이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스포일러 하나. 

산문의 맨 마지막 장,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건  좋은 선택이라 보여진다. 그게 픽션이건 아니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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