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을 볼 수 없는 늙은 전직 군인 Vs 남자 두명과 여자 한명의 젊은 좀도둑

1:3이 벌이는 육탄전은 보나마나  결과가 뻔해 보인다. 

늙은 맹인이 과연 젊은 세명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러나 공간이 맹인의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화는 디트로이트의 빈 동네에 위치한 맹인의 집을 좀도둑이 털면서 시작한다. 쉽게 털 수 있을 것 같은 빈 집은 맹인이 잠에서 깨어나며 예측할 수 없는 사건으로 치닫는다. 암전이 된 맹인의 집에선 맹인과 정상인의 위치는 바뀌기 마련. 좀도둑들은 앞을 못 봐 허둥대고 맹인은 손바닥 뒤집 듯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는다. 분노한 맹인이 한 명을 죽이고 나머지 두 명을 쫓는 가운데, 맹인과 맹인이 사는 집의 비밀이 한꺼풀씩 벗겨진다. 


맹인이 돈을 숨겼을 거라 예상했던 자물쇠를 채운 방에 좀도둑이 들어서면서 맹인의 정체는 공포로 다가온다. 엄청난 비밀을 가진 거대한 악 앞에 선 좀도둑은 생존에 급격한 위험을 느끼게 되고, 돈을 훔치는 게 아닌 탈출이 절박한 목표가 되고 만다. 영화는 공포 스릴러지만 갑자기 놀라게 하거나 유혈이 낭자하지 않는다.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와 약간의 반전만으로도 스릴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스포일러 조금 가미하고 결말을 밝히면, 선과 악이 따로 없는 주인공들이 어느 정도 타협하며 사건을 마무리 한다. 굳이 권선징악에 매달리지 않는다. 때문에 불편한 사람도 있을 법 하다. 맹인의 돈을 빼앗는 대신 맹인의 과거는 묻어주는 무언의 타협을 하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는 빼앗은 돈을 새로운 세계로 도전하는 주인공의 몫으로 남겨뒀다. 쏟아질 수 있는 비난을 감독이 의식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영화를 탓하고 싶지 않다. 우리 사는 세상이 언제 권선징악이 지배했던 적이 있던가. 타협으로나마 악에 대한 적절한 견제가 주어진다면 그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영화가 씁슬한 게 아니라 이런 사회가 씁쓸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일 뿐.


 


김찬호의 <모멸감>. 


이 책은 제목의 참신성과는 달리 콘텐츠가 많이 부족해 실망했다. (제목에 낚인..?)

굳이 정독하지 않더라도 소제목만 연결해 읽으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잡아챌 수 있지 싶다. 

300 페이지 넘는 분량을 아까운 시간을 들여 소모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선 저자는 1장에서 모멸감의 정의나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케이스에 대해 설명한다. 구구절절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결론은 하나다. 모멸감이란 수치심으로 느낄 수 있는 최악의 단계라는 것. 수치심을 이런 단계로 분류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으나, 그렇다고 단어들의 의미를 모르진 않았다. 저자의 얘기를 세줄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수치심 : 본인의 잘못이나 결함에 대한 타인의 지적을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감정

모욕감 :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분노나 원한을 품을 수 있음)

모멸감 : 모욕과 경멸의 의미가 함께 쓰이는 단어이므로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


사실 이 책을 선택하면서 기대했던 건 표지에 써있던 '감정사회학'이라는 단어였다. 사회적 관점에서 해석되는 개인의 감정이란 대체 뭘까? 개인의 감정을 사회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까? 기존의 책에선 볼 수 없던 거라 몹시 궁금했다. 힐링 따위의 언어유희를 바라진 않았을 터. 그러나 나의 기대는 일단 첫 장에서부터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이어지는 2장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어의 특성상 의태어, 의성어가 많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채롭다, 귀천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다, 신분제가 붕괴되었으나 심리적 의식은 계속되고 있다, 위계서열과 힘의 서열이 극심하다, 공동체가 붕괴된 가운데 집단주의가 엄존한다, 인종주의와 콤플렉스가 있다 등이다. 그런데 드는 의문은 그런 경향은, 여기서 특색이라 하기엔 좀 약하다, 과연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며칠 전 다녀왔던 발리에서 현지인에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Widarsa에 의하면 인도네시아 이름에는 성이 없는 대신 신분을 나타내는 단어가 버젓이 있다고 했다. 이름만 들으면 이 사람의 신분, 성별을 알 수 있단다. 그렇다고 신분을 넘어선 결혼이 금지된 건 아니다. 다만 관행적 계급의식이 이름에 유적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야 말로 신분제의 형식적 붕괴와 의식적 관행이 실재하는 모순이 치열하게 교차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국적 특성으로 모멸감을 해석하려 한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서는 모멸감이 사회적 문제로 더 부각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2장은 한국 이외 케이스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있어야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이 굳이 문화인류학으로 확장되지 않더라도, A를 주장할 때 A의 여집합인 B의 경우는 어떠한지 분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모멸감을 느끼는 상황도 그렇다. 인간이하로 취급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구분 짓거나, 비웃고 깔보거나, 대놓고 혹은 은근히 밀어내거나, 시선의 폭력에서 섣부른 참견까지, 불쌍한 대상으로 못 박거나, 문화의 코드 차이라고 얘기한다. 이 역시 소제목을 나열한 것 이상의 새로운 내용은 없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모멸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뇌의 반응, 호르몬의 분비,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행동패턴 등이다. 모멸감을 둘러싼 정신적 신체적 변화, 사람 간의 변화에 대해 심리학적 혹은 사회학적 의미를 고찰했다면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었을 텐데 실망감만 곱씹어댔다. 표지에서 언급한 '감정사회학'이란 단어는 정작 내용 어디에서도 그 존재가치를 찾을 수 없다. 


4장은 인간적인 사회를 향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3장까지의 내용을 견주어 4장 역시 지고지순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같았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품위를 잃지 않도록, 문제는 감수성이다, 물리적 쾌적함, 생리적 청결함, 화폐의 논리를 넘어선 세계, 소수자들의 연대와 결속, 환대의 시공간 등 소제목 이상의 깊이 있는 분석은 역시 찾기 힘들다. 


더욱 실망스러운 건 결말이다. 생존에서 존엄으로라는 제목의 5장은 어이없이 힐링을 지향하고 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나를 모욕한다 해도, 감정의 주인이 되려면, 행복감은 우월감이 아니며 등으로 문제 해결을 내적 성찰로 성급히 결말 내고 있다. 하긴 저자는 서문에서 모멸에 대한 내성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개인적 수준에서 성찰해야 한다고 못 박긴 했다. 또 "사회나 제도 차원에서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모욕을 전혀 겪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내면이 강해져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진정한 자존감의 문제로 귀결되고 감정의 움직임에 주책없이 끌려다니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회 구조를 개혁하지 않는 선에서 사회 불만을 외면하고픈 전형적인 기득권의 목소리다. 


적어도 이 책은 모멸감을 둘러싼 인간의 반응, 사회적으로 모멸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원인, 계층별로 벌어지는 모멸감의 유형, 그리고 개인의 모멸감을 사회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해결책 등을 논리적으로 주장했어야 했다. 시종일관 '감정사회학'과는 관계 없는 뜬금 없는 결말로 허탈한 웃음과 함께 책을 덮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출판된 수많은 힐링 류의 책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낙오된 시민들에게 힐링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더랬다. 사회 구조적 결함으로 빚어낸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소외를 개인적 명상으로 해결하라는 건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힐링은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때 쓰는 용어일 뿐, 사회적 모순을 잊게 만드는 아편 같은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뱀발.

빅 히스토리를 지향하는 책들은 거시적인 시각으로 미시적인 사건을 덮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은 거시적인 역사적 사건을 미시적인 감정선에 무리하게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보인다. 그런 해석은 정확하지 않을 뿐더러 책의 신뢰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간만에 인상적인 영화를 봤다. 

보는 내내 스토리가 극단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랐는데,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 

어디든 추천할 수 있는 좋은 영화, 러스트 앤 본. 별 4개 반 날리고 싶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가장 빛난 건 스토리다. 역시 탄탄한 원작 소설 덕분이지 않을까. 이 영화엔 진부한 사랑 타령도, 케케묵은 권선징악도, 눈물 콧물 빼는 신파도 없다. 볼 땐 쥐어짜면서도 보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그런 시시한 영화가 아니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의 평범한 이야기로 감동을 빚어냈기에 스토리는 묵직하다. 이런 영화를 사람들은 웰메이드 영화라고 한다. 



우선 남자 주인공 알리. 알리는 아들을 건사하기 위해 클럽의 경호원에서, 마트 노조를 감시하는 불법까지 서슴없는 별 볼 일 없는 삼류인생이다. 여자 주인공 스테파니는 평범한 범고래 조련사다. 그렇고 그런 두 사람이 클럽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스테파니가 공연 도중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하면서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 절망의 끝에서 스테파니가 문득 연락한 남자는 알리. 알리는 스테파니를 무심히 대하지만, 스테파니는 그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 반면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섹스 파트너 이상의 감정은 갖지 않지만, 아들의 사고를 계기로 둘은 사랑의 길을 걷게 된다. 


탄탄한 스토리는 군더더기가 없다는 얘기다. 영화 중간에 나오는 알리와 누나의 관계, 불법 감시로 누나가 실직하게 되고 자기도 직장을 잃게 되는 것 등은 훌륭히 빈 틈을 메워준다.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이야기가 흐르는 것과 어떻게 저렇게 이야기가 흘러가지 하는 차이는 흡입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또 하나 인상적인 건 감독의 연출력이다. 

한 신에서 모든 결과를 보이려 하지 않고 절제해서 영화를 끌고 나가는 힘이 좋다.  결말도 충분히 길게 끌고 나갈 수 있음에도 감독은 굳이 그런 뻔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 듯 짤막하게 주인공들의 삶을 보여줬다. 그래서 여운이 더욱 깊게 남는 것 같다. 특히 손가락 뼈는 다른 뼈와 달리 아물지도 않을 뿐 아니라, 충격이 있을 때마다 고통이 그대로 전해진다는 걸 자막으로 처리한 건 압권이다. 영상을 능가하는 텍스트의 힘이랄까. 감독의 탁월한 연출 덕분에 영화는 <챔프>같은 신파극이 아닌 명작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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