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읽게 된 <7년의 밤>은 마치 영화를 보 듯 숨가쁘게 읽혀진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가 서술하느냐에 따라 긴장감은 이렇게 달라진다. 

작가의 필력 덕분이다. 


이 책은 어느 날 밤 일어난 사고 혹은 살인이 불러온 나비효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다들 if를 달고 후회하지 않을까 싶다. 이왕 엎어진 물은 담을 수 없는 법.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은 각자의 계산에 따라 행동한다. 생존을 위해 벌이는 두뇌게임 같다. 그러나 두뇌게임을 할 만큼 영리하지 않은 캐릭터도 있다. 아들을 향한 아빠의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 하지만 그 어떤 힘보다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눈길이 가는 인물은 아들 서원이다. 서원은 이름보다 살인자의 아들로 사회에서 기억된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자연스럽게(?) 부당한 주변의 냉대와 대우를 받고 있다. 심리적 연좌제의 적용 대상인 셈이다. 


문명화될 수록 죄에 대한 벌과 범죄자에 대한 처리방식은 응징에서 교화로 바뀌어 간다. 연좌제도 제도적으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규범적 연좌제의 소멸과 달리 심리적 연좌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 악령처럼 남아 있다.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어떤 심리적 신체적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면죄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그들을 안아줄 수 있을 만한 포용력이 없다. 


유사한 책이 있다. 1999년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2명의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가 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이다. 놀랍게도 가해자의 엄마는 사고 당시의 집에서 계속 살고 있다. 이웃이 가해자의 범죄가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인식했고 그녀를 포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수 클리볼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교 역할을 하고 공감의 힘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단다. 미국이 처음부터 이런 케이스를 만든 건 아니다.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책을 보면 저자 잭 이브라힘 역시 <7년의 밤> 서원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주위의 냉대는 물론 폭력에 시달렸고, 20번 넘는 이사를 해야 했다. 개명까지 했다. 90년 11월 메이르 카하네 암살사건의 범인 엘사이드 노사이르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불과 10년의 갭을 두고 미국 사회는 포용의 힘을 키운 것이다. 


<7년의 밤>의 서원을 보며 우리 사회가 언제쯤 편견 없이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올지 궁금했다. 건강한 신체는 무균실이 아닌 세균에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눈길도 안주는 책이 있다면 자기계발 관련 책이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자기 발전의 한계를 사회제도가 아닌 개인 탓으로 돌리고 경쟁사회에서의 승리를 지고지선임을 맹목적으로 주입한다. 이 논리에 빠지면 개인은 체제에 순응하게 되고, 사회는 기득권층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자기계발서와 비교할 순 없지만, 자기성찰 도서 역시 광의의 이데올로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경쟁을 똟어낸 성취만큼 이나 욕심버리기를 통한 안분지족 역시 특정 사고방식을 주입하는데 익숙하다. 힐링이 결국 외부가 아닌 내면세계에 집중하여 온갖 시름에서 벗어나자는 것 아닌가. 둘 간의 차이는 기득권층 이익에 얼마나 봉사하느냐 여부다. 과거 법가, 유가, 도가 등 집권층의 권력유지 이론이 피지배계층의 생활 철학으로 자리잡은 것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를 통합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 책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는 '욕망의 자유'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욕망의 자유, 즉 선택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저자인 아잔 브라흐마라가 불교 승려임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무언지 아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라깡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내 욕망의 실체를 정확히 안다면 그 욕망을 내려놓을 필요도 욕망에 집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다시 말하면 죽기 전에 진정한 자기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인간은 노력하고 발전한다.


저자는 개별 사례들을 나열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은 벽돌에 관한 이야기다. 집을 만들 때 벽돌 2 개를 잘 못 쌓아 매번 무너뜨릴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제자리에 잘 쌓여진 998개의 벽돌에 주목하라고 하니, 그 집이 다시 보이더란다. 


"물론 내 눈에는 잘못 놓인 2 장의 벽돌이 보입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쌓아 올린 998개의 벽돌들도 보입니다." 


이 깨달음에서 많은 것이 떠올랐다. 부분적인 허물에 집착해 전체적인 장점에 소홀했던 어리석음에서 앞으로 잘 못 쌓을지 모를 두려움까지 모두 훌훌 털어버려야 하지 않을까. 


자기성찰서는 내면에 존재하나 평소 깨닫지 못했던 가치를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이다. 사회의 변혁을 이끄는 이데올로기와 동행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앙상블을 이룰 것이다. 간디가 그러했 듯이.


뱀발. 류시화 시인이 번역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던 건 사랑에 대한 정의다. 내게 사랑이란 단어는 타인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기에, 작가가 주장하는 논지에 쉽게 동의되지 않았다. 머릿 속으로는 이해갈 듯 하나, 가슴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가는 사랑의 원초적인 의미인 에로스를 사회적 시각으로 해석한 듯 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두 개인 사이의 가벼운 계약관계가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경험"


에로스에 대한 정의다. 어렵다. 또 하나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세계를 돈으로 규격화시키기에 '동일성의 지옥'이라 표현하고 동시에 사랑의 주체들을 나르시시즘의 함정에 빠뜨린다고 본다. 돈은 새로운 경계를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하기 때문이다." 


결국 타자성이란 게 사랑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데, 자본주의 질서가 타자성을 방해하고 사랑이 꽃필 수 없는 곳으로 만든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돌이켜 보면 신자유주의의 양극화 현상이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대중들이 생업에 쫓겨 각박한 감정의 사회가 되고, 금전적 잣대로 개개인을 평가하는 사회이긴 하다. 그래서 결혼율이나 출산율이 저하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로스가 종말되었다는 주장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과거 지금보다 더 살기 힘들었던 시대에도 분명 사랑은 존재했고, 앞으로도 자본주의가 심화된다 한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종말의 길을 걸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에 대한 정의가 작가와 나 사이 간극이 크다고 봐야 한다. 만약 작가가 규정하는 사랑을 인간관계로 치환한다면, 나로선 읽기 수월해진다. 왜냐하면 사회구조의 빈화방향을 봤을 때 인간관계가 점점 사막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선 구조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해석하는 게 맞는지부터 이견이 달린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을 개인 감정의 영역으로 남겨뒀다. 본능적 감정이 아닌 후천적 학습으로 체득되어지는 사랑은 사회구조적인 영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이 책은 사랑보단 사회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타자성을 증발시킨 나머지 사랑의 행위마저 금전적 가치로 매기는 건 낯설지 않다. 이 책에서 예로 든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드는 궁금증 하나. 왜 굳이 번역의 형식을 띠었을까? 독일어로 초판을 찍었다 해도 저자가 한국어로도 출판할 수 있었을 텐데.. 



여행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야만 하는 책. 


이 책은 여행작가가 무엇이고, 되기 위해선 무얼 준비해야 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선 무얼 버텨내야 하는가 알 려준다. 한 마디로 여행작가를 꿈꾸기는 쉬워도 따라하기는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 실제 여행작가의 지극히 현실적인 얘기라 설득력이 남다르다. 그래서 이 책은 읽기에 따라 여행작가의 꿈을 키울 수도 깨뜨릴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작가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여행작가는 책만으론 밥 먹기 힘들단다. 여행도 자비로 갔다 와야 하기에 ROI를 맞추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뭔가 스폰서가 있을 법하지만, 그런 건 가물에 통나듯 하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공짜밥은 없다는 게 이 바닥 생리다. 여행지건 호텔이건 홍보는 필수고 책에 광고라도 한 장 삽입해야 한다. 그냥 속 편하게 자기 돈을 먼저 때려박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기 돈 들여 써낸 컨텐츠가 활자화된 책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또 얼만가. 책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인세로 통장잔고에 찍히는 건 생각만큼 크지 않단다. 따라서 강연 등의 부업을 해야 하며 그마저 없을 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 노마드의 삶이 초원이 뒤덮인 여름엔 배를 채울 수 있지만, 눈으로 가득한 겨울엔 무조건 버텨내야 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보면, 여행작가란 직업은 매력적이긴 한가 보다.


가슴에 콕 박혔던 글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1. 우선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써봐라. 책 한 권은 폰트 10 크기로 A4 50장 정도다

2. 글을 썼으면 묵혀라. 시간이 지난 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 퇴고를 해라. 

3. 사진을 스토리와 디테일이 살아있게 잘 찍어야 한다. 메시지의 힘은 글보다 사진이 클 수 있다.

4 카메라는 가급적 좋은 걸 써라. 

5. 책을 내기 위해선 완성원고를 쓰고 기획서를 출판사에 보내 협의한다. 

6. 사진을 잘 찍으려면 우선 노출, 초점, 균형을 맞춰라. 피사체 외 잡스러운 것은 치워라. 

7. 블로그, 트위터 등 SNS를 잘 활용하자. 단 블로그는 이미지와 글이 7:3 글이 많아야 5:5가 되는 게 중요하다. 



한 분야에 가(家)를 이룬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치열한 투쟁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오랜 세월을 지켜왔다는 자체가 그에게 보통 사람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바둑에 대한 호감과 함께 삶에 대한 자세를 배울 수 있게 한다. 


조훈현은 바둑을 두 듯 인생을 살고, 바둑의 판세를 읽 듯 인생을 해석한다. 그게 옳던 그르던 그는 그렇게 살았고, 그 선택의 축적분이 지금의 그다. 한 때 온라인 바둑게임 사업을 하면서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그 길이 바둑 저변 확대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온갖 비난에도 떳떳할 수 있었다. 비록 사업은 실패해서 결과적으로 악수를 둔 셈이지만, 인생에선 악수인 걸 알면서도 둬야 한다고 주잔항다. 오히려 그는 나이 어린 친구들이 하기엔 비난이 더 커지고, 나이가 든 사람이 하기엔 부담스러우니 자신이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까지 보였다. 어쨌든 그 진정성은 책에서 충분히 느껴졌다. 


한 가지 공감했던 건 삶의 자세에 대한 조언이다. 매너는 가르칠 수 있지만, 인품은 못 가르친다는 것, 가르치려 덤비는 순간 망가질 수 있기에 그저 모범이 되라는 얘기는 새겨둘 만한 교훈이다. 누구나 알지만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반면 알파고와 같은 AI에 대해서 오판한 면이 있다. 아무리 기보를 외워도 고수는 사고의 깊이가 있기에 한 순간에 승부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디 오판이 조훈현만의 생각이었을까. 그렇게 이세돌의 패배는 전 국민의 충격이었다. 


번외로 바둑을 모르는 나로선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유창혁의 바둑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바둑류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건 인생과 비슷해서 일 것이다. 천재형과 노력형, 공격형과 수비형 등 자신의 스타일을 대입해 응원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조훈현은 그런 면에서 내가 선호했던 기사는 아니었다. 된장국 냄새 나는 서봉수를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책에선 두 사람이 사석에서 피하는 사이라는 게 의외기도 하고, 한편 이해되기도 한다. 그만큼 치열한 승부를 했을 테니 말이다. 



“10만 년 전 지구상에는 최소 여섯 가지 인간 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존재하는 종은 하나뿐이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


이 책에는 빅 히스토리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각이 담겨있다. 인지혁명에서 농업혁명, 과학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각각 인간이 똑똑해지고, 자연을 길들이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신의 영역에 진입한 것으로 해석했다.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 등과 함께 동시대에 경쟁 혹은 공존하며 살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박물관에선 유인원에서 직립 인간까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진화론으로 오해하게금 전시를 해왔다. 학교에서도 비슷하게 배웠더랬다. 앞으론 좀 더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흥미로웠던 건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과 동시대에 치열하게 다투면서도 성관계를 하기도 했다는 점. 그 결과로 인종에 따라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의 DNA 비율이 다르다는 것은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식민지 시대 인종 개량론이나 청소론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사피엔스가 진격한 대륙마다 거대동물과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등이 멸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사피엔스는 생태계의 블랙홀같은 존재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연쇄살인마일 테고.


반면 이 책은 빅 히스토리에 집중하다 보니 미시적인 관점에 소홀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식민지 수탈을 기반으로 제국의 번영했다는 사실을 하나의 팩트일 뿐 교훈의 대상으로 삼진 않는다. 오히려 제국주의를 역사 발전과정의 불가피한 측면으로 해석한다. 그런 관점은 하나의 시각으로서 존중할 순 있지만, 식민지를 경험했던 민족의 일원으로서 불편하다.


결과적으로 농업혁명이 사피엔스를 정착하게 했지만, 삶의 질은 수렵시대의 그것에 비해 나아지지 않았다고 하라리는 봤다. 사피엔스의 신체구조가 농사를 하기엔 부적합하며, 특정 작물을 경작하는 사피엔스의 경우 흉작일 때 굶을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설명이다. 이는 과학혁명 이후에도 적용되어, 종의 번성과는 별개로 인간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개인의 영역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런 류의 결론은 허무하다 못해 슬프다. 언제까지 행복은 현실에 만족해야 얻어지는 개인의 몫이어야 할까. 


또한 수렵시대와 농업혁명 이후의 사피엔스의 행복치를 비교하는 게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건 아닌지도 의문스럽다. 어쨌든 사피엔스는 외부 세계의 위협을 끊임없이 제거해왔고 개인 역량과 상관없이 종의 힘에 기대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특정 개인의 케이스로 시대를 정의하는 건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토론거리를 제공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에 빠졌던 종교시대의 사피엔스가 무지를 인정한 순간 과학혁명을 열 수 있었다. 제국의 이익을 위해 과학은 밀착되었고, 그 혁명이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그 결과 인류는 동일한 역사권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신이 되려는 사피엔스의 종말을 예감한다. 알파고로 대변되는 AI의 활돔범위가 확장을 거듭하다 결국 인류의 의식을 대신하지 않을까 하는 그 불길한 예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류 멸방 시나리오로 4 가지를 꼽았다. 핵전쟁, 지구 온난화, 바이러스, 로봇이 그것. 이중 3개는 인류가 만들어낸 창조물이고 1개는 영향을 끼친 자연현상이다. 결국 사피엔스는 하늘을 날다 떨어지는 이카루스의 전철을 밟는 건 아닐까.



저자에 대한 사전정보가 전혀 없던 내게 다른 사람들의 극렬한 반응은 놀라웠다. 책모임 사람들 중 일부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저자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 저자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들어보니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직접 접하지 않는 상태에서 남의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진 않는다. 그리고 내겐 저자의 과거보단 책 내용에 집중하고 싶었다. 


저자는 굳이 산문집이라고 주장한다. 소설이라고 해도 좋으련만 소설이라고 하기엔 논픽션의 요소가 많아서 그런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 역시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어쨌든 운문이 아니라는 면에서 산문집이라고 한 들 틀린 말은 아니다. 


산문은 주인공의 자잘한 일상을 영화 보듯 보여준다. 이혼남과 이혼녀가 만나는 일상은 그리 로맨틱하지 않다. 현실과 뒤엉킨 에피소드들은 구질구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묘사가 외려 더 오래 잔상에 남는 법. 픽션과 논픽션의 절묘한 줄타기로 독자에게 공감을 얻는 게 저자가 노린 점이 아닐까 싶다.


산문에 등장하는 장소는 실명을 써서 그런지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광화문 교보문고는 개인적으로 자주 가는 곳이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자의 의도가 소설이 아닌 산문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읽으면서 내내 머릿 속을 맴돌았던 생각은 이게 논픽션일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논픽션이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스포일러 하나. 

산문의 맨 마지막 장,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건  좋은 선택이라 보여진다. 그게 픽션이건 아니건 간에.



이 책은 회사에 두고 짬 날때마다 읽었다. 하루에 몇 십장을 읽을 때도 있었고, 며칠간 한 장 못 넘길 때도 있었다. 단숨에 읽어내진 않아선지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에도 앞의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앞의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책은 결말만으로도 훌륭하다. 내가 이해하는 셸리 케이건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두번째 유사영생의 길, 즉 내 사후에도 존재할 의미있는 성취를 일궈낸 삶이 의미있는 삶이다. 


셸리 케이건은 죽음에 대해 얘기하지만, 사실 이 책은 삶에 대한 책이다. 죽음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배경으로, 혹은 막연한 두려움으로 죽음을 대하고 그에 맞춘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죽음은 삶을 대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케이건은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밝힌다. 자신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방식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점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간접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말하지만, 논리적으로 합당하기에 다른 어떤 주장보다 강력하다. 그래서 이 책은 꼭 죽음에 대한 얘기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논리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다. 공포는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는 달라진다. 이 책은 영혼의 존재를 따지면서 시작한다. 영혼이란 있을까? 인간을 영적 존재로 보는 이원론자는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혹은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반면 일원론자는 영혼은 있을 수 있으나 육체의 부분이라 주장한다. 


케이건은 일원론의 입장에서 이원론을 공격한다. 물리적 관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기 어려우며, 영혼이나 전생이 있다 해도 육체에서 비롯된 기억이 없다면 현재 살아있는 자신과 어떤 연관관계도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사후세계는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육체가 생체기능을 중지하는 순간 영혼은 사라지는 것이며, 정신과 영혼 모두 육체에서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인간을 육체, 인격, 영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인격의 종말을 죽음으로 정의한다면 인격이 사라지고 영혼만 윤회하는 불교, 힌두교, 등의 환생논리 역시 결국 육체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라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결국 나와 연관된 기억, 욕구 등을 포함한 인격이 사라진 채 영혼만이 영생을 한다면 영생한다한들 현재의 나와는 어떤 연결고리도 찾기 어렵다. 


갑자기 영화 <메트릭스>가 떠올랐다. <메트릭스>에서는 타인의 경험을 다운로드해 더 강력한 파워를 장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무술을 고수처럼 하게 되고, 헬기를 조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적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쉽지 않은 얘기다. 다운로드하는 매뉴얼은 누군가의 육체를 기반으로 수련된 결과물이므로 신체조건이 다른 타인에게 맞을리 없다. 물론 이식할 수 있다는 전제 또한 검증된 바 없다. 이런 면에서 정신, 그리고 나아가 영혼 역시 육체와 유기되어 생각하긴 어렵지 않을까?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케이건은 우선 죽음이 나쁜가 질문부터 던진다. 죽음이 나쁜 건 내가 삶에서 누리고 있는 좋은 것들을 잃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생은 좋은 것일까? 삶이 괴로운데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이를 논의하기 위해 케이건은 그릇이론을 들고 나온다. 삶을 그릇이라 가정할 때 나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담아 그 총합이 플러스인가 마이너스인가를 계산해 삶을 평가한다. 지극히 수학적인 방식이지만 이해하기엔 편하다. 플러스인 인생에선 영생이 축복이지만, 마이너스가 지속되는 인생에서 영생은 저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이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여부는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이 지점부터 케이건은 삶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고픈 이야기를 여기에 담았다고 본다. 죽음은 삶에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필연성, 가변성, 예측불가성, 편재성 등 죽음의 특성이 결국 삶을 아름다고 가치있게 만들어준다는 주장이다. 이런 삶과 죽음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삶을 더욱 활기차게 가꾸어 줄 수 있기에 우리는 삶을 좀 더 성찰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의 서두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다. 케이건이 보는 가치있는 삶이란 내 사후에도 존재할 의미있는 성취를 일궈낸 삶이 의미있는 삶이다. 후대에도 계속 언급될 생명력을 지닌 자신의 성취물이 있다면 그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얘기다. 충분히 가슴에 새겨볼 만한 논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비록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성취물 없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 관련한 따뜻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회자된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참고로 케이건은 민감한 문제인 자살도 이야기한다. 죽는 게 더 나은 삶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는 합리성과 도덕성이라는 두가지 관점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케이건은 합리성과 도덕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런 삶이 존재할 수 있으나, 자살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살요인이 그 순간 대단한 것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확률 또한 크기 때문이다. 대단히 용기있는 주장이다. 도덕적으로 자살을 터부시하는 맹목성이야말로 인간의 합리적인 선택 자체를 박탈하는 건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케이건은 종교적 관점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신이 부여한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을 신의 뜻에 대한 거역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신이 부여한 생명을 연장시키는 의료행위 또한 거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성경에 씌여있기 때문에 자살을 죄악시하는 것 또한 신화적인 믿음에 가깝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얘기도 있지만, 지금 그것을 지켜야할 금기로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케이건이 주장하는  것처럼 삶을 단순히 계량화할 수는 없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다르고 추구하는 목적 또한 다르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기까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꼭 후대에 남길 성취물이 있어야만 의미있는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안빈낙도와 가정의 평화를 위한 삶 또한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글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게 지도와 나침반이듯이,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하고 싶다면 죽음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에게 피할 수 없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권할 만 하다.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는 알려진대로 폴 고갱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갱의 작품은 쉽게 접하면서도 그의 삶에 대해선 그리 알려진게 없는데, 이 소설을 읽어보면 고갱이란 작가의 면모를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다. 


프랑스 출신의 고갱은 소설속에서 런던 출신의 증권 중개인 스트릭랜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평범한 삶을 살았던 스트릭랜드가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떠나면서, 소설은 추리소설같은 미궁 속으로 빠진다. 도대체 왜 그가 안빈낙도를 버리고 파리로 떠났는지 주변 사람들은 온갖 억측으로 추리해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맞히지 못한다. 단순하게도 그는 정말 그림을 위해 파리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47세의 나이로 말이다.  


빈 손으로 떠난 스트릭랜드는 파리에서 생활고를 겪는다.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작가로서의 꿈을 차근히 준비한 그는 작품활동에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주변을 고려하지 않는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이 기피하는 인물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몇 사람만큼은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헌신적인 도움을 준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더크 스트로브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단 화가인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빨리 캐치했다. 그에게 스트릭랜드의 예술작품은 분명 존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트로브의 예술적 빈곤함을 알아 챈 스트릭랜드는 그를 철저히 홀대했고, 그럼에도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를 숭상했다. 그런 나머지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 아내인 블란치마저 빼앗기고 블란치도 스트릭랜드의 버림을 받아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이쯤에서 책이 시작할 무렵 글을 다시 되새겨 보자. 책에는 지위가 아닌 인간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스트릭랜드라고 규정했다. 아마도 서머셋 몸은 스트릭랜드의 예술을 향한 불같은 집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열정을 형상화한 것이 달(Moon)이었을 테고, 그에 반해 세속적인 가치가 6펜스짜리 은화였을 것이다. 결국 타히티 섬에까지 가서 자신의 예술적 노력을 바쳐 불멸의 작품을 남긴 스트릭랜드의 불꽃같은 예술정신은 인류 역사에 길이 길이 남았다. 


하지만 그의 집념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의 발현에 불과하다. 그 끝이 비록 가치있는 결론을 낳았다 할지라도, 그는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배신했으며, 철저히 주변 사람을 이용했다. 의도했건 아니건 결과적으론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셈이다. 다른 게 있다면 그는 정말 순수한 예술정신을 지녔고, 또 그만큼 자신을 학대했을 뿐이다. 나쁜 남자와 비견된다. 그에 비하면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는 참으로 인간미 넘치는 나쁜 남자였다. 그는 적어도 남을 위해 눈물 흘렸던 마음을 지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나쁜 남자둘에게는 여자를 끄는 마력이 있는 듯 하다. 파리에서도 타히티 섬에서도 스트릭랜드는 여자들의 관심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난 주변에서 스트릭랜드와 유사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예술적 소양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그런 주변 파괴적인 인격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불처럼 화려하지만 모든 걸 집어 삼키는 사람 보다 흘러가는 물처럼 주변과 융화하는 사람이 더 좋지 않을까? 조르바도 부담스럽지만 스트릭랜드는 사절이다. 



18. 

大道廢(대도폐) : 대도가 폐하면 

有仁義(유인의) : 인이니 의니 하는 것이 나서고 

慧智出(혜지출) :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면 

有大僞(유대위) : 엄청안 위선이 만연하게 된다 

六親不和(륙친불화) : 가족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면 

有孝慈(유효자) : 효니 자니 하는 것이 나서고 

國家昏亂(국가혼란) :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有忠臣(유충신) : 충신이 생겨난다

 

19. 

絶聖棄智(절성기지) : 성스런 체함을 그만두고 아는 체함을 버리면 

民利百倍(민리백배) : 사람에게 이로움이 백 배나 더할 것이다 

絶仁棄義(절인기의) : 인을 그만두고 의를 버리면 

民復孝慈(민복효자) : 사람이 효성과 자애를 회복할 것이다 

絶巧棄利(절교기리) : 재간 부리기를 그만두고 이익보려는 마음을 버리면 

盜賊無有(도적무유) : 도둑이 없어질 것이다 

此三者以爲文不足(차삼자이위문불족) : 이 세 가지는 문명을 위하는 일이지만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故令有所屬(고령유소속) : 그러므로 뭔가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見素抱樸(견소포박) :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한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少私寡欲(소사과욕) : <나>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다

 

20. 

絶學無憂(절학무우) : 배우는 일을 그만두면 근심이 없어질 것이다 

唯之與阿(유지여아) : <예>라는 대답과 <응>이라는 대답의 

相去幾何(상거기하) :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善之與惡(선지여악) :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의 

相去若何(상거약하) :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人之所畏(인지소외) :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不可不畏(불가불외) : 나도 두려워해야 하는가 

荒兮其未央哉(황혜기미앙재) : 얼마나 허황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인가 

衆人熙熙(중인희희) : 딴 사람 즐거워하기를 

如享太牢(여향태뢰) : 모두 소 잡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하고 

如春登臺(여춘등대) : 봄철 망두에 오른 것처럼 기뻐하는데 

我獨泊兮其未兆(아독박혜기미조) : 나 홀로 멍청하여 무슨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兒之未孩(여영아지미해) :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기만 한다 

儽儽兮若無所歸(래래혜약무소귀) : 지친 몸이나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 같다 

衆人皆有餘(중인개유여) : 세상 사람들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而我獨若遺(이아독약유) :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我愚人之心也哉(아우인지심야재) : 내 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沌沌兮(돈돈혜) : 흐리멍텅하기만 한다 

俗人昭昭(속인소소) : 세상 사람들 모두 총명한데 

我獨昏昏(아독혼혼) : 나 홀로 아리송하고 

俗人察察(속인찰찰) : 세상 사람들 모두 똑똑한데 

我獨悶悶(아독민민) : 나 홀로 맹맹하다 

澹兮其若海(담혜기약해) : 바다처럼 잠잠하고 

飂兮若無止(료혜약무지) : 쉬지 않는 바람 같다 

衆人皆有以(중인개유이) : 사람들 모두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 

而我獨頑似鄙(이아독완사비) :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인다 

我獨異於人(아독이어인) : 나 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은 

而貴食母(이귀식모) : 나 홀로 어머니 젖먹을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21. 

孔德之容(공덕지용) : 위대한 덕의 모습은 

惟道是從(유도시종) : 오로지 도를 따르는 데서 나온다 

道之爲物(도지위물) : 도라고 하는 것은 

惟恍惟惚(유황유홀) : 황홀할 뿐이다 

惚兮恍兮(홀혜황혜) : 황홀하기 그지 없지만 

其中有象(기중유상) : 그 안에 형상이 있다 

恍兮惚兮(황혜홀혜) : 황홀하기 그지 없지만 

其中有物(기중유물) : 그 안에 질료가 있다 

窈兮冥兮(요혜명혜) : 그윽하고 어둡지만 

其中有精(기중유정) : 그 안에 알맹이가 있다 

其精甚眞(기정심진) : 알맹이는 지극히 참된 것으로서 

其中有信(기중유신) : 그 안에는 미쁨이 있다 

自古及今(자고급금) : 예부터 이제까지 

其名不去(기명불거) : 그 이름 없은 적이 없다 

以閱衆甫(이열중보) : 그 이름으로 우리는 만물의 시원을 볼 수 있다 

吾何以知衆甫之狀哉(오하이지중보지상재) : 내가 무엇으로 만물의 시원이 이러함을 알 수 있었겠는가 

以此(이차) : 바로 이 때문이다

 

22. 

曲則全(곡즉전) : 휘면 온전할 수 있고 

枉則直(왕즉직) :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窪則盈(와즉영) : 움푹 파이면 채워지게 되고 

幣則新(폐즉신) : 헐리면 새로워지고 

少則得(소즉득) : 적으면 얻게 되고 

多則惑(다즉혹) :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시이성인포일위천하식) :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고 세상의 본보기가 된다 

不自見故明(불자견고명) :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不自是故彰(불자시고창) : 스스로 옳다 하지 않기에 돋보이고 

不自伐故有功(불자벌고유공) :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 

不自矜故長(불자긍고장) :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간다 

夫唯不爭(부유불쟁) : 겨루지 않기에 

故天下莫能與之爭(고천하막능여지쟁) :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한다 

古之所謂曲則全者(고지소위곡즉전자) : 옛말에 이르기를, 휘면 온전할 수 있다고 한 것이

豈虛言哉(개허언재) : 어찌 빈말이겠는가 

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 : 진실로 온전함을 보존하여 돌아가시오

 

23. 

希言自然(희언자연) :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故飄風不終朝(고표풍불종조) : 회오리 바람도 아침 내내 볼 수 없고 

驟雨不終日(취우불종일) : 소낙비도 하루 종일 내릴 수 없다 

孰爲此者(숙위차자) : 누가 하는 일인가 

天地(천지) : 하늘과 땅이다 

天地尙不能久(천지상불능구) : 하늘과 땅도 이처럼 이런 일을 오래 할수 없는데 

而況於人乎(이황어인호) : 하물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故從事於道者(고종사어도자) : 그러므로 도에서 일을 따르는 사람은 

道者同於道(도자동어도) : 도는 도에서 하나가 되고 

德者同於德(덕자동어덕) : 덕은 덕에서 하나가 된다 

失者同於失(실자동어실) : 잃음을 따르는 사람은 잃음과 하나가 됩니다 

同於道者(동어도자) : 도와 하나된 사람 

道亦樂得之(도역락득지) :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同於德者(동어덕자) : 덕과 하나된 사람 

德亦樂得之(덕역락득지) :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同於失者(동어실자) : 잃음에서 하나된 사람 

失亦樂得之(실역락득지) :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할 것이다 

信不足焉有不信焉(신불족언유불신언) : 신의가 모자라면 불신이 따르게 마련이다

 

24. 

企者不立(기자불립) :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단단히 설 수 있고 

跨者不行(과자불행) : 다리를 너무 벌리는 사람은 걸을 수 없다 

自見者不明(자견자불명) :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밝게 빛날 수 없고 

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 :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은 돋보일 수 없고 

自伐者無功(자벌자무공) :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自矜者不長(자긍자불장) :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오래갈 수 없다 

其在道也(기재도야) : 도의 입장에서 보면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 이런 일은 밥찌꺼지 군더더기 같은 행동으로 

物或惡之(물혹악지) :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 그러므로 도의 사람은 이런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25. 

有物混成(유물혼성) : 분화되지 않은 완전한 무엇 

先天地生(선천지생) :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다 

寂兮寥兮(적혜요혜) :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고 

獨立不改(독립불개) : 무엇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周行而不殆(주행이불태) : 두루 편만하여 계속 움직이나 없어질 위험이 없다 

可以爲天下母(가이위천하모) : 가히 세상의 어머니라 하겠다 

吾不知其名(오불지기명) : 나는 그 이름을 모른다 

字之曰道(자지왈도) : 그저 <도>라 불러 본다 

强爲之名曰大(강위지명왈대) : 구태여 명명하라 한다면 <크다>고 하겠다 

大曰逝(대왈서) : 크다고 하는 것은 끝없이 뻗어 간다는 것 

逝曰遠(서왈원) : 끝없이 뻗어 간다는 것은 멀리 멀리 나가는 것 

遠曰反(원왈반) : 멀리 멀리 간다는 것은 되돌아가는 것이다 

故道大(고도대) : 그러므로 도도 크고 

天大(천대) : 하늘도 크고 

地大(지대) : 땅도 크고 

王亦大(왕역대) : 임금도 크다 

域中有四大(역중유사대) : 세상에는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而王居其一焉(이왕거기일언) : 사람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人法地(인법지) : 사람은 땅을 본받고 

地法天(지법천) : 땅은 하늘을 본받고 

天法道(천법도) : 하늘은 도를 본받고 

道法自然(도법자연) :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26. 

重爲輕根(중위경근) :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이다 

靜爲躁君(정위조군) : 조용한 것은 조급한 것의 주인이다 

是以聖人終日行(시이성인종일행) : 그러므로 성인은 하루 종일 다닐지라도 

不離輜重(불리치중) : 짐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雖有榮觀(수유영관) : 화려한 경관이 있을지라도 

燕處超然(연처초연) : 의연하고 초연할 뿐이다 

柰何萬乘之主(내하만승지주) : 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의 임금이 

而以身輕天下(이이신경천하) : 어찌 세상에서 가볍게 처신할 수 있겠는가 

輕則失本(경즉실본) : 가볍게 처신하면 그 근본을 잃게 되고 

躁則失君(조즉실군) : 조급하게 행동하면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27. 

善行無轍迹(선행무철적) : 정말로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달린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善言無瑕謫(선언무하적) : 정말로 잘하는 말에는 흠이나 티가 없다 

善數不用籌策(선수불용주책) : 정말로 계산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계산기가 필요없다 

善閉無關楗而不可開(선폐무관건이불가개) : 정말로 잘 닫힌 문은 빗장이 없어도 열리지 않는다 

善結無繩約而不可解(선결무승약이불가해) : 정말로 잘 맺어진 매듭은 졸라매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다 

是以聖人常善求人(시이성인상선구인) :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 주고 

故無棄人(고무기인) : 아무도 버리지 않는다 

常善救物(상선구물) : 물걸을 잘 아끼고 

故無棄物(고무기물) :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 

是謂襲明(시위습명) : 이를 일러 밝음을 터득함이라 한다 

故善人者(고선인자) :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不善人之師(불선인지사) :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요 

不善人者(불선인자) : 선하지 못한 사람은 

善人之資(선인지자) : 선한 사람의 감이다 

不貴其師(불귀기사) : 스승을 귀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나 

不愛其資(불애기자) : 감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雖智大迷(수지대미) : 비록 지혜롭다 자처하더라도 크게 미혹된 상태이다 

是謂要妙(시위요묘) : 이것이 바로 기막힌 신비이다


28. 

知其雄(지기웅) : 남성다움을 알면서 

守其雌(수기자) : 여성다움을 유지하라 

爲天下谿(위천하계) : 세상의 협곡이 될 것이다 

爲天下谿(위천하계) : 세상의 협곡이 되면 

常德不離(상덕불리) : 영원한 덕에서 떠나지 않고 

復歸於孀兒(복귀어영아) : 갓난아기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知其白(지기백) : 흰 것을 알면서 

守其黑(수기흑) : 검은 것을 유지하라 

爲天下式(위천하식) : 세상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爲天下式(위천하식) : 세상의 본보기가 되면 

常德不忒(상덕불특) : 영원한 덕에서 어긋나지 않고 

復歸於無極(복귀어무극) : 무극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知其榮(지기영) : 영광을 알면서 

守其辱(수기욕) : 오욕을 유지하라 

爲天下谷(위천하곡) : 세상의 골짜기가 될 것이다 

爲天下谷(위천하곡) : 세상의 골짜기가 되면 

常德乃足(상덕내족) : 영원한 덕이 풍족하게 되고 

復歸於樸(복귀어박) : 다듬지 않은 통나무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樸散則爲器(박산즉위기) :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룻이 된다 

聖人用之(성인용지) : 성인은 이를 사용하여 

則爲官長(즉위관장) : 지도자가 된다 

故大制不割(고대제불할) :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는 자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


29. 

將欲取天下而爲之(장욕취천하이위지) : 세상을 휘어잡고 그것을 위해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吾見其不得已(오견기불득이) : 내가 보건대 필경 성공하지 못하고 만다 

天下神器(천하신기) : 세상은 신령한 기물 

不可爲也(불가위야) : 거기다가 함부로 뭘 하겠다고 할 수 없다 

爲者敗之(위자패지) : 거기다가 함부로 뭘 하겠다고 하는 사람 그것을 망치고 

執者失之(집자실지) : 그것을 휘어잡으려는 사람 그것을 잃고 말 것이다 

故物或行或隨(고물혹행혹수) : 그러므로 만사는 다양해서 앞서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뒤따르는 것도 있고 

或歔或吹(혹허혹취) : 숨을 천천히 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빨리 쉬는 것도 있고 

或强或羸(혹강혹리) : 강한 것이 있는가 하면 약한 것도 있고 

或挫或隳(혹좌혹휴) : 꺾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것도 있다 

是以聖人(시이성인) : 따라서 성인은 

去甚去奢去泰(거심거사거태) : 너무함, 지나침, 극단 등을 피한다

30. 

以道佐人主者(이도좌인주자) : 도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은 

不以兵强天下(불이병강천하) : 무력을 써서 세상에 군림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其事好還(기사호환) : 무력을 쓰면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오게 마련이어서 

師之所處(사지소처) : 군사가 주둔하던 곳엔 

荊棘生焉(형극생언) : 가시엉겅퀴가 자라나고 

大軍之後(대군지후) : 큰 전쟁 뒤에는 

必有凶年(필유흉년) : 반드시 흉년이 따르게 된다 

善有果而已(선유과이이) : 훌륭한 사람은 목적만 이룬 다음 그만둘 줄 알고 

不敢以取强(불감이취강) : 감히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果而勿矜(과이물긍) : 목적을 이뤘으되 자랑하지 않고 

果而勿伐(과이물벌) : 목적을 이뤘으되 뽐내지 않고 

果而勿驕(과이물교) : 목적을 이뤘으되 교만하지 않는다 

果而不得已(과이불득이) : 목적을 이뤘으나 할 수 없어서 한 일 

果而勿强(과이물강) : 목적을 이뤘으되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物壯則老(물장즉로) : 무엇이나 기운이 지나치면 쇠하게 마련 

是謂不道(시위불도) : 도가 아닌 까닭이다 

不道早已(불도조이) : 도가 아닌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끝장이 난다


31. 

夫佳兵者(부가병자) : 훌륭하다는 무기는 

不祥之器(불상지기) : 상서롭지 못한 물건 

物或惡之(물혹악지) : 사람이 모두 싫어한다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 그러므로 도의 사람은 이런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君子居則貴左(군자거즉귀좌) : 군자가 평소에는 왼쪽을 귀히 여기고 

用兵則貴右(용병즉귀우) : 용병 때는 오른쪽을 귀히 여긴다 

兵者不祥之器(병자불상지기) :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 

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 : 군자가 쓸 것이 못 된다 

不得已而用之(불득이이용지) : 할 수 없이 써야 할 경우 

恬淡爲上(념담위상) : 조용함과 담담함을 으뜸으로 여기고 

勝而不美(승이불미) : 승리하더라도 이를 미화하지 않는다 

而美之者(이미지자) : 이를 미화한다는 것은 

是樂殺人(시락살인) : 살인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 : 살인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 : 세상에서 큰 뜻을 펼 수 없다 

吉事尙左(길사상좌) : 길한 일이 있을 때는 왼쪽을 높이고 

凶事尙右(흉사상우) : 흉한 일이 있을 때는 오른쪽을 높인다 

偏將軍居左(편장군거좌) : 둘째로 높은 장군은 왼쪽에 위치하고 

上將軍居右(상장군거우) : 제일 높은 장군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言以喪禮處之(언이상례처지) : 이는 상례로 처리하는 까닭이다 

殺人之衆(살인지중) :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으면 

以哀悲泣之(이애비읍지) : 이를 애도하는 것 

戰勝以喪禮處之(전승이상례처지) :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이를 상례로 처리해야 한다


32. 

道常無名(도상무명) : <도>는 영원한 실재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엇인데 

樸雖小(박수소) :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비록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天下莫能臣也(천하막능신야) : 이를 다스릴 자 세상에 없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 임금이나 제후가 이를 지킬 줄 알면 

萬物將自賓(만물장자빈) : 모든 것이 저절로 순복할 것이요 

天地相合(천지상합) : 하늘과 땅이 서로 합하여 

以降甘露(이강감로) : 감로를 내릴 것이요 

民莫之令而自均(민막지령이자균) : 명령하지 않아도 백성이 스스로 고르게 될 것이다 

始制有名(시제유명) : 다듬지 않은 통나무가 마름질을 당하면 

名亦旣有(명역기유) : 이름이 생깁니다 

夫亦將知止(부역장지지) : 이름이 생기면 멀출 줄도 알아야 한다 

知止可以不殆(지지가이불태) : 멈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는다 

譬道之在天下(비도지재천하) : 이를테면 세상이 도로 돌아감은 

猶川谷之於江海(유천곡지어강해) : 마치 개천과 계곡의 물이 강이나 바다로 흘러듦과 같다


33. 

知人者智(지인자지) :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自知者明(자지자명) :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이다 

勝人者有力(승인자유력) : 남을 이김이 힘있음이라면 

自勝者强(자승자강) : 자기를 이김은 정말로 강함이다 

知足者富(지족자부) : 족하기를 아는 것이 부함이다 

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 : 강행하는 것이 뜻있음이다 

不失其所者久(불실기소자구) : 제자리를 잃지 않음이 영원이다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 죽으나 멸망하지 않는 것이 수를 누리는 것이다


34. 

大道氾兮(대도범혜) : 큰 도가 넘쳐 있음이여 

其可左右(기가좌우) : 이쪽 저쪽 어디에나 

萬物恃之而生而不辭(만물시지이생이불사) : 온갖 것이 이에 의지하고 살아 가더라도 이를 마다하지 않고 

功成不名有(공성불명유) : 일을 이루고도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衣養萬物而不爲主(의양만물이불위주) : 온갖 것 옷입히고 먹이나 그 주인 노릇하려 하지 않는다 

常無欲(상무욕) : 언제나 욕심이 없으니 

可名於小(가명어소) : 이름하여 <작음>이라 하겠다 

萬物歸焉(만물귀언) : 온갖 것 다 모여드나 

而不爲主(이불위주) : 주인 노릇하려 하지 않으니 

可名爲大(가명위대) : 이름하여 <큼>이라 하겠다 

以其終不自爲大(이기종불자위대) : 그러므로 성인은 스스로 위대하다고 하지 않는다 

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 : 그러기에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35. 

執大象(집대상) : 위대한 형상을 굳게 잡으십시오 

天下往(천하왕) : 세상이 모두 그대에게 모여들 것이다 

往而不害(왕이불해) : 그대에게 모여들어 해받음이 없을 것이다 

安平太(안평태) : 오직 안온함과 평온함과 평화만이 깃들 것이다 

樂與餌(락여이) : 음악이나 별미로는 

過客止(과객지) : 지나는 사람 잠시 머물게 할 수 있으나 

道之出口(도지출구) : 도에 대한 말은 

淡乎其無味(담호기무미) : 담박하여 별맛이 없다 

視之不足見(시지불족견) : 도는 보아도 보이지 않고 

聽之不足聞(청지불족문) :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用之不足旣(용지불족기) : 써도 다함이 없다


36. 

將欲歙之(장욕흡지) : 오므리려면 

必固張之(필고장지) : 일단 펴야 한다 

將欲弱之(장욕약지) : 약하게 하려면 

必固强之(필고강지) : 일단 강하게 해야 한다 

將欲廢之(장욕폐지) : 폐하게 하려면 

必固興之(필고흥지) : 일단 흥하게 해야 한다 

將欲奪之(장욕탈지) : 빼앗으려면 

必固與之(필고여지) : 일단 줘야 한다 

是謂微明(시위미명) : 이것을 일러 <미묘한 밝음>이라 한다 

柔弱勝剛强(유약승강강) :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깁니다 

魚不可脫於淵(어불가탈어연) : 물고기가 연못에서 나와서는 안됨같이 

國之利器(국지리기) : 나라의 날카로운 무기도 

不可以示人(불가이시인) :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37.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 도는 언제든지 억지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 된 것이 없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 임금이나 제후가 이를 지키면 

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 : 온갖 것 저절로 달라집니다 

化而欲作(화이욕작) : 저절로 달라지는데도 무슨 일을 하려는 욕심이 생기면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 : 이름없는 통나무로 이를 누른다 

無名之樸(무명지박) : 이름없는 통나무로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 욕심을 없애노니 

不欲以靜(불욕이정) : 욕심이 없으면 고요가 찾아들고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 온누리에 평화가 깃들 것이다


노자를 굉장히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패턴이 있다. 무릉도원이 문명의 이기를 버리고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하는 삶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현대의 힐링과 합쳐져 현실 참여 의지를 억누르고 자기 만족적인 수동적인 삶으로 인도하곤 한다. 개인의 문제를 수양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건 개인적으론 나무랄 수 없으나, 이로 인해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도외시하는 건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도덕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당시 춘추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피폐해진 민중의 현실을 벗어나 도피하고 싶은 처절한 이야기가 곳곳에 배어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덕경은 당시의 제후와 제자백가들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일갈하는 내용임에도, 마치 문명을 부정하는 안빈낙도로 해석하는 것은 고전을 제대로 읽는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그럼에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자체가 이 글모음의 긴 생명력을 증명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