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빌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라서 '데쓰 프루프(Death proof)'는 언젠가 꼭 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주말 새벽에 봤는데요. 타란티노 감독의 색채가 물씬 풍겨나더군요. 역시 독특한 감독임에 틀림없습니다. 명장의 반열까지는 모르겠고, 여느 감독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맛이 매력적입니다. 왜 타란티노가 박찬욱감독을 좋아하는지도 알 것 같네요. 뭔가 묘하게 풍기는 둘만의 공통점이 눈에 뜨이네요.

'데쓰 프루프'는 2007년에 제작되었구요. '킬빌'은 2003년과 2004년에 만들어졌는데요. '킬빌'이 동양적 느낌의 복수극이라면, '데쓰 프루프'는 웨스턴 무비 스타일의 복수극이라 할 수 있죠. 두 영화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키워드가 복수라는 것 외에도 많습니다. 복수의 대상이 남자고, 주인공은 여자라는 점, 흑백의 장면이 사용된다는 점, 잔혹한 장면이 희화화된다는 점, 그리고 '킬빌'에서 휘파람으로 불렸던 노래가 '데쓰 프루프'에서는 핸드폰 컬러링으로 사용된다는 점... 등 '킬빌'의 후예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타란티노 감독이 말하는 바가 무얼까 생각했습니다. 미치광이의 말로는 이렇다는 것일까? 아니면 자동차는 함부로 몰면 안된다는 걸까? 딱히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감독의 의도가 헷갈렸거든요. 근데 곰곰 생각해 보면, 아마 남자와 여자가 느끼는 섹스의 쾌감을 표현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영화 전반부에는 마초적인 냄새가 가득합니다. 사이코적인 커트 러셀에게 미모의 여자들이 달라붙고 유혹하기도 하거든요.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죠. 기괴한 차의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올라타는 미녀, 그리고 무턱대고 들이대는 사이코에게 호감을 감추지 않는 또 하나의 미녀... 모두 남성본위의 섹스 판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차안에서 죽음에 이르는 미녀가 사이코에게 애원하는 장면, 그리고 그 모습에 쾌감을 느끼며 웃음을 짓는 사이코 모습은 마초의 궁극 절정이 아닌가 싶네요.

하지만 후반부에는 달라지죠. 처음에는 사이코에게 당하지만, 결국 보이시한 여자들의 복수로 사이코는 처절하게 응징을 당하거든요. 복수의 주인공들은 강간을 혐오하기에 늘 총을 휴대하고 다니는가 하면, 스턴트우먼의 길을 걷기도 하고, 터프한 운전실력을 갖추고 있는 등 범상치 않은 여자들입니다. 여성상위시대의 전사가 아닐까 하는... 결국 이들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철저하게 여자의 시각에서 진행되죠. 영화의 스토리부터 여자들의 수다로 이끌어지구요. 별다른 장면없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수다로 스토리의 앞뒤가 꿰맞춰집니다. 그리고 달리는 차 위의 본넷에 오른 조이 벨의 희열은 오르가슴을 상징하지 싶네요. 이런 오르가슴을 방해한 사이코는 여전사 4명의 무차별 구타로 뻗구요. 최후의 일격은 공포의 스템핑이었습니다. 사이코의 눈을 정확히 찍었죠. UFC에서도 보기 힘든... 그런 기술... 흠냘...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타란티노 감독은 엽기적인 상상력으로 재밌게 해줬구요. 영화 보는 내내 짜릿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짜릿함이 감독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나 싶네요. '킬빌'도 결국 그런 패턴이었구요. 영화 '데쓰 프로프'가 국내에서 개봉했었는지는 모르지만, 흥행까지는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킬빌'에 비해 영화적 재미는 다소 떨어졌거든요. 어쩌면 타란티노 감독에게 늘 '킬빌'을 능가하는 강렬한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는 것, 그건 흥행의 약이자 독이니까요.

덧글...
예전 영화 '탱고와 캐쉬'에서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했던 커트 러셀... 많이 늙었더군요.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게 역시 세월인가 봅니다. 커트 러셀의 사이코 연기도 꽤 잘 어울리구요. 역시 대배우의 변신은 무죄라능... 흠... 그리고 예전에 단짝친구와 휘젖고 다닐 때, 그 친구는 탱고로 우모는 캐쉬로 불리기도 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능...(퍽!) 흐...


한번 꼭 보고 싶었던 영화, '워낭소리'를 회사 동료들과 함께 봤습니다. 영화라기 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실제인물을 덤덤하게 그려내서 더욱 호소력이 느껴지더군요. 특히나 요즘같이 힘든 시기에 매우 인간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게 관객들을 많이 끌어모은게 아닌가 싶은데요. 워낙 입소문이 강해서 그런지 기대만큼은 눈물샘을 자극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무리수를 두지 않아 오히려 담백했습니다.

영화는 평생을 소와 함께 농사를 지어온 노인과 소의 이야기입니다. 노인은 농사지을 힘이 없고, 소는 수레를 끌 힘이 부치고, 집에 뒹구는 라디오는 작동을 하지 않죠. 모두 고물이 되어버린 인생 끝자락에 놓여있는 신세죠. 하지만 이들은 의지하면서 버텨왔고, 힘들지만 그 생활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불편함이 아니라 생활 자체였기 때문이죠. 우모의 친척 중에도 그런 분이 한분 계시는데요. 충분히 쉬면서 여생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굳이 힘든 일을 멈출 생각을 안하시죠. 주위에서 보면 안타깝지만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으시더라구요. 어떻게 보면 고집불통, 워커홀릭으로 보이지만 그게 그 분의 삶인걸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영화 속의 최노인을 안쓰럽지만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끝부분에 이 땅에서 자식을 위해 힘들게 일해온 아버지와 소를 위해 이 영화를 바친다고 자막을 올렸습니다. 평생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아버지와 소는 가슴 찡하게 울리는 공통의 감동코드를 지녔는데요. 영화 보는 내내 아버지를 많이 생각하게 하더군요. 당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도 있었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게 되구요. 영화에서 잠깐 비쳤던 아버지와 가족의 거리감, 소외감 등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동시에 저렇게 늙으면 안되겠구나 생각도 되구요.

동료들과 맥주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토론의 주제가 딱딱한 업무에서 탈피한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었구요. 영화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얘기하다보니 서로의 성향도 잘 알 수 있게 되어 좋았습니다. 영화는 78분으로 짧게 끝났지만 술자리는 200분 가깝게 이어진걸 보면 모두 유익했던 시간에 공감했던 것 같네요. 결국 다음 달 회식 스케쥴로 금~토요일에 동해바다로 가자는 제안까지 나왔습니다. 1박2일이 못내 부담스럽긴 한데 동료들은 부리나케 날짜까지 잡더군요. (헉!)

음... 동해바다라... ㅡㅡ;;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권에 이어 2권을 읽었습니다. 1권이 시골의사 자신이 봤던 이야기들이라면, 2권은 자신과 연관되어 있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썼더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책을 잡은지 두어시간만에 한달음에 읽어 제꼈으니까요.

2권은 1권과 유사한 톤으로 씌여져서 특별히 새롭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코멘트를 추가할 것도 별로 없구요. 우리 주위에 드라마틱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 그리고 시골의사의 말대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져봤습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사는게 누구나의 꿈이지만, 누구나의 소유물은 아닌 듯 싶네요. 사랑이 그렇게 쉽게 만져질 수 있도록 널려 있는거라면 드라마에서 허구헌 날 사랑타령은 하지 않을꺼니까요. 그렇다고 사랑이 밤하늘의 별처럼 먼나라의 얘기도 아니구요. 주위를 돌아보는 따뜻한 시선만 있으면 언제든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 시선을 갖기엔 우리의 이기심이 워낙... 음...

읽고나면 기분좋은 책이 있는 반면, 읽고나도 착잡해지는 책도 있죠.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은 두가지 느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따뜻해지면서도 먹먹해지는...


김광석의 노래 중에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라는 곡이 있습니다. 왠지 그 노래를 들을 때면 코끝이 시큰해져옴을 느끼는데요. 가사는 파란만장한 삶을 같이 살아온 아내를 먼저 보내는 남편의 애절한 심정을 담았죠. 하지만 이 노래는 이상하게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나게 해서, 김광석 노래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슬픈 노래로 꼽기도 합니다. 


그런데 연극 중에서 '늙은 부부이야기'라는게 있더라구요. 몇년 전부터 대학로에서 공연을 해왔는데, 포스터를 볼 때마다 '언젠가는 꼭 봐야지' 하고 마음 먹곤 했습니다. 왠지 김광석의 가사만큼 애절하고 아름다운 스토리일꺼 같았거든요. 와이프는 그렇진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눈으로 확인을 해야 직성을 풀리는 성격인지라 늘 마음속 위시리스트에는 있었습니다. 그 연극을 드디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포스터에 끌린지 거의 3~4년만이지 싶네요.

결론부터 말하면 연극은 와이프 말대로 김광석의 노래 가사와는 약간 빗겨 서있었습니다. 노래가사와는 달리 연극의 늙은 부부는 백년해로한 커플이 아닌 늙으막에 다시 재혼한 커플의 이야기였구요. 자식들을 키우느라 온갖 풍상에 늙어간 부부라기 보다는,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는 연인의 이야기에 가까웠습니다. 부성애, 모성애를 기대했던 저로서는 실망이 아닐 수 없었죠.

하지만 연극은 뛰어난 배우의 연기로 저의 실망을 상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점순 역의 성병숙, 박동만 역의 윤여성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리얼하게 연기했고, 덕분에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죠. 막판에는 많이 슬펐습니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홀로 남은 사람은 무척 쓸쓸하게 보이거든요. 특히 눈물로 그리워하는 장면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하죠.

객석은 연극 제목처럼 중년 이상의 부부들이 많으셨는데요. 연극을 보면서 관객의 반응도 살폈는데, 여자분만큼 남자분들도 많이 우시더라구요. 남자도 늙으면 센치해지는가 봅니다. 바로 앞줄에 앉았던 할아버지는 혼자 오셔서 내막이 궁금하기도 했는데, 연극을 보시면서 우시지는 않으시더군요. 대신 눈만 껌벅껌벅...

연극 마지막에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더군요. 진한 김광석의 음성을 들으니 그제서야 속에서 뭔가 후련하게 씻기는 느낌이었습니다. 스토리야 어찌 됐든 노부부가 추구하는 사랑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제목 때문에 본 연극이었지만, 그렇다고 보고 후회할 만한 연극도 아니었네요.
 
극장을 나오면서 대학로 거리를 걸으면서 김광석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광석이 형은 왜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떳는지... 참 아쉽습니다. 그만한 가수도 없는 것 같아서... 

덧글...
김광석의 노래를 안들어볼 수가 없네요. 



주식 투자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유명한 시골의사 박경철씨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주식에 그닥 관심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의사가 주식을 한다는 자체도 그닥 좋아보이진 않았던게 사실이었거든요. 의학을 돈버는 데만 사용하는 일부 의술쟁이들에 대한 환멸 때문이랄까요. 의사가 주식투자 도사가 되었다는건 선생님이 과외로 돈벌이 한다는 것처럼 세속적으로 느껴지더라구요. 실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그 연장선으로 이해했던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은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책을 읽다보니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던게 부끄러워지더군요. 적어도 그는 약자에 대한 연민에 고민해왔다는걸 알게 되니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구요. 더불어 이웃에 대한 사랑, 주변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더군요. 책을 읽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슴 뭉클한 다큐멘터리를 본 듯한 경험이었습니다. 한번쯤 보셔도 좋을듯 싶네요.

책은 의사를 하면서 겪게 되는 환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정확히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 관심을 가지라는 외침이죠. 돈이 없어서 수술을 받기 힘든 사람, 나병환자라는 죄책감에 말기암이 되도록 병원을 거부하던 할아버지, 치매로 자신이 사랑하는 손자를 죽이게 된 할머니 등 그늘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너무 담담한 필체 때문에 슬픔이 더욱 커지는 느낌이네요.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는 수십년간 앞만 보고 달려온 탓에 뒤쳐진 사람들에 대해 멸시와 냉소를 보냈던게 사실입니다. 구조적인 모순으로 낙오자가 되었지만, 모든건 그 개인의 능력부족으로 돌려버리고 무관심해왔죠. 산업화의 병폐라고 할 수 있는데요. 같이사는 사회를 만들기에는 아직도 대한민국은 성공신화만 꿈꾸며 미친듯 달리고만 있습니다.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말이죠. 남이야 어찌됐든 성공만 하면 되고, 도덕성이야 누가 뭐래고 하든 돈만 잘벌면 대접받는 사회가 현재 우리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청와대에 살고 있는 사람부터 대표적인 케이스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병원 르뽀 프로그램과 다른 시각에서 그늘진 사람들에 대한 이면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이게 과연 한국의 현실인가 싶기도 하구요. 아직은 따뜻한 손길이 많이 필요한 대한민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보는 의료보험체계의 비현실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영화 '쿵푸팬더' 재밌었습니다. 온 가족이 웃고 즐기기에 적당한 애니메이션인지라, 아무 고민없이 영화만 보게 되더군요. 덕분에 곧 설이나 추석연휴에 늘 빠지지 않는 성룡영화를 대체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런 영화에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본다는 것 또한 피곤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끔은 뇌는 쉬게하고 눈과 귀로만 영화를 볼 필요도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는 슈렉과 좀 비교된다능~

쿵푸팬더를 보니 헐리웃이 중국시장을 본격적으로 겨냥하는 냄새가 나네요. 하긴 10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인구가 있으니 무리도 아니겠죠. 

덧글...
성룡이 목소리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몽키였더군요. 왜 하필 중국문화 소재영화인데, 몽키였을까요? 흠냘~ 안젤리나 졸리와 더스틴 호프만 목소리는 알아챘는데 나머지는 잘 모르겠더라능~


'왕의 남자'가 조선시대 왕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였다면, '쌍화점'은 고려시대 왕의 그것을 소재로 삼아 유사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왕의 남자'가 왕의 스캔들 대상을 광대로 삼은 대신 '쌍화점'은 무사와의 격정 스토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죠. 아직까지 동성애 코드가 충무로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네요. '왕의 남자'의 흥행성공에 이어 '쌍화점'도 탄탄한 흥행을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는 그런대로 볼 만은 했지만, 좀 산만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주인공 홍림(조인성 역)의 감정선이 뚜렷하지 못한게 원인이지 싶습니다.

영화는 고려시대 말 공민왕으로 추정되는 왕(주진모 역)과 호위무사 총관인 홍림간의 동성애에 원나라 출신인 왕후(송지효 역)와의 삼각관계가 변화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왕을 중심으로 홍림과 왕후간의 신경전이 이어졌지만, 왕이 후사를 빌미로 홍림과 왕후간의 합궁을 명하면서 홍림과 왕후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되죠. 왕만을 바라봐야 하는 두 사람이 치명적인 사랑에 점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눈치를 채게 된 왕의 질투가 영화를 파국으로 치닫게 합니다.


결말은 뭐 직접 보시는게 낫구요. 중간에 조인성과 주진모의 자극적인 동성애 장면이 좀 충격적이긴 합니다. '왕의 남자'에 비하면 하드코어급에 속하더군요. 조인성과 송지효의 정사장면이 오히려 밋밋하게 느껴졌다는... 하여간 그런대로 괜챦은 영화입니다. 장면 하나하나를 성실히 찍었다는게 화면에서 느껴질 정도로 탄탄합니다.

다만, 왕의 캐릭터가 너무 인자한 나머지 홍림의 분노가 잘 이해가 안가기도 했구요. 중간중간 느낌표 보다는 물음표가 더올랐던 장면이 있어 아쉬웠습니다. 어쩌면 나만 이해 못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왕후를 연상케 하는 인물을 포함한 5명의 목을 성밖에 걸어놓고 홍림을 끌어들인 왕의 의도는 져전히 아리송하군요. 그리고 그렇게 끌어들인 이유가 단지 홍림이 자신을 진정 사랑했었는지 알고 싶었던건지도 궁금합니다.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양날의 칼이었는데 말이죠.

공민왕의 천산대렵도를 스캔들의 모티브로 삼은 점은 꽤 신선했습니다. 좀더 섬세한 터치로 시나리오를 만들었으면 훨씬 더 완성도가 높지 않았을까 싶네요.


백만년만에 대학로 연극을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본게 2003년인가의 '날 보러와요' 였던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확실치는 않네요. 하여간 공연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연극을 그동안 관람하지 못했던건 생업에 쫓기는 생활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은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본다는건 거짓말이거든요. 그간의 무심함에 반성하며 대학로를 찾았는데요. 연극을 보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우모가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냄새' 때문입니다. 소규모 연극인 경우 고작 20~30명을 앞에 두고 공연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바로 1m 앞에서 실감나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배역이 아닌 배우의 열정에 더 감동받게 되더군요. 열악한 현실에서도 열정 하나로 연기에 몰두하는 모습은, 남대문시장에서 받는 삶에 대한 강한 체취와 유사합니다. 이에 반해 뮤지컬은 좀 다르죠. 뮤지컬도 배우의 열정이 숨쉬긴 하지만, 관객과의 거리감이 어느 정도 확보된 상태에서 연기하기에 감동의 농도는 연극에 못미칩니다. 그래서 우모는 왠지 배우와 하나되는 느낌의 연극을 좋아합니다.

연극 '마리화나 2008'은 대학로 어느 외진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더군요. 찾기 쉽지 않았습니다. 위로는 고시원이 있는 허름한 건물 지하에 극장이 있더라구요. 너무 썰렁해서 '설마 이런데 극장이 있나?' 싶었습니다. 매표소도 단촐하구요. 따로 관객들이 대기하는 곳이 마땅치 않아 극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먼저 도착한 관객들끼리 그냥 옹기종기 서있었죠. 마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모여있는 펭귄들처럼... 게다가 난로마저 고장나서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안내요원이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하는데 기분나쁘기 보다는 '그래 이게 바로 연극이야' 하며 흐뭇해했죠. 만약 예술의 전당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면 당장 항의했을텐데, 그놈의 '사람냄새'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너무나도 너그러운 소비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복도 한켠에 놓인 중국음식 빈 그릇까지도 이뻐보이더군요.


연극 '마리화나 2008'은 대학로에서 꽤 인기있는 작품입니다. 오달수와 서주희의 출연도 그렇지만,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한 충실한 대본 덕분인데요. 기대에 어긋남 없는 유쾌한 2시간이었네요. '마리화나 2008'을 분석하면 역사적 사실, 즉 팩트에 덧붙여진 픽션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문종이 세자였던 시절, 문종의 두번째 부인 봉빈이 소쌍, 단지라는 나인과 삼각관계이자 동성애 관계였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퇴위당한 사건이구요. 픽션은 세자, 봉빈, 소쌍, 단지, 석가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용보, 부귀라는 허구인물을 내세워 관계를 더욱 복잡하고, 음란하면서도, 재밌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연극은 리뷰하기도 벅찰만큼 난삽하게 꼬여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삼각관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7명은 모두 연관되어 있죠. 칠각관계라고 해도 될만큼 서로를 속이며, 아니 은밀하게 본능을 해소해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실타래처럼 얽힌 관계를 풀지 못하자, 마지막에 세자가 '떼로 하면 어떨까?' 하는 화두를 던지며 끝을 맺습니다. 유교의 본고장 조선시대의 궁궐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결론인 셈이죠. 

연극은 인간에게는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이 있다는걸 보여줍니다. 본능이 억제되어 있는 가장 극적인 공간으로 궁궐을 내세웠구요. 본능이 거세되어버린 환관과 나인들을 그 상징인물로 등장시켰습니다. 하지만 연극의 전반적인 해학이 외설스러움을 보다듬어서 부담스럽지는 않네요. 오달수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왜 그가 대배우인가를 말해주고요. 차순배의 여장연기도 볼 만 했습니다. 양보람과 채국희, 조승연의 감초연기도 괜챦았네요. 기대했던 서주희는 발성이 약간 약하지 않나 싶었는데, 와이프는 괜챦았다고 하네요. 관점의 차이인가 봅니다. 그리고 김영철의 대사에서 NG가 나왔는데 덕분에 더 크게 웃었네요. 주변 배우들의 애드립으로 무난하게 넘어갔는데 역시 배우는 센스가 필수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대학로로 나왔는데 엄청 춥더군요. 늦은 시간이었지만 떡볶기까지 먹고 왔습니다. 깻잎 떡볶기라고 나름 유명한 집이더군요. 맛은 뭐 늘 그렇듯 뭐든 다 맛있습니다.^^ 정말 간만에 연극을 보니 다시 예전 대학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더군요. 소원했던 와이프와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구요. 무엇보다 잃어버렸던 감수성을 찾았다는 점이 행복하게 하네요. 조만간 다른 연극도 시간을 내볼까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는데요. 하루키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독특한 시각으로 잘 쓰는 스타일인지라 매번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많이 느끼게 합니다. 그게 아마 문장력이 아닌가 싶은데요. 같은 글을 써도 어렵게 풀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참 편하게 전개하는 사람이 있죠. 하루키는 분명 후자에 속하는 사람일겁니다. 

이 책도 역시 예외는 아니더군요. 좀 특이해서 이게 소설인가? 싶은 생각도 들구요. 뭔가 끝맺음이 없는 단편영화를 보는 듯한... 독특한 문장력... 하지만 재미는 있네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책 서두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이야기나 들었던 실화를 옮겨적는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스케치'라고 표현을 했는데요. 미술작품을 완성하기 전 기본 뎃생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굳이 완결짓지 않더라도 토막토막 끊어진 구조에서도 충분히 작가의 감정은 전달되는 것 같네요.

이 책에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나옵니다. 관통하는건 사랑인데요. 이룰듯 이루지 못하는 사랑, 그것도 약간은 뒤틀어진 사랑들이 나옵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도 약간 거시기한 감정들도 있구요. 기억에 남는건 묘한 이유로 인해 이혼을 선언한 일본 중년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혼자 독일여행을 갔다가 남편을 위해 '레더호젠'이라는 반바지를 사는 과정에서 이혼을 결심하는데요. 그 이유가 이해갈듯 말듯 하네요. 남편과 비슷한 체형을 지닌 사람이 레더호젠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남편에 대한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이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품처럼 끓어올랐다고 하던데... 아마 자신이 막연하게 느껴왔던 남편에 대한 거부감이 레더호젠을 통해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게 아닌가 추측됩니다만...

순간 티셔츠건 바지건 항상 직접 사왔던 내가 고마웠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영국사람에게는 영국사람의 감동코드가 있듯이, 한국사람에게는 한국사람에 맞는 감동코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러브 액츄얼리'의 아류일꺼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닥 관심을 두진 않았었는데요. 편견의 벽을 없애고 영화를 보니 겨울철 따뜻한 털장갑을 낀 듯한 느낌이네요. 역시 한국사람에게는 쓴 커피보다 구수한 숭늉이 어울립니다.

이 영화는 잘 짜여진 시나리오도 볼만했지만,배우들의 연기가 압권이네요. 임창정, 서영희, 주현, 오미희, 윤진서, 김수로, 황정민, 엄정화천호진 모두 자연스럽게 배역에 녹아 들어갔습니다. 연기를 잘한다는건 본인 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역할에 몰입하게 만드는데요. 때로는 긴장되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기쁘게 만든 덕분에 영화는 두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등장하는 많은 커플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임창정, 서영희 커플이 가장 감동적이네요. 특히 임창정이 지하철 안에서 봉투를 뒤집어 쓰고 승객앞에서 아내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던 장면은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간 임창정이 출연했던 영화는 대부분 웃긴 코드가 한두 장면은 들어갔는데요. 이 영화에서는 전혀 그런게 없었죠. 소시민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줬습니다. 마치 짐 캐리를 보는 듯하더군요. 임창정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서 행복했습니다.

영화는 '러브 액츄얼리'의 아류작 답게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맺습니다. 주현과 오미희 커플의 로맨틱한 엔딩장면은 근래 본 프로포즈 중 가장 멋있지 않았나 싶네요. 나이가 들어도 충분히 젊게 사는거 보니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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