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주는 먹먹한 감동을 수치화 한다면, 이 영화는 필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을 것이다. 

영화가 우리의 현실을 이미 반영했기 때문이고, 영화가 우리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먹먹함을 넘어 공포까지 느끼게 된다면 너무 지나친 빈약일까?



영화는 구조적 측면에서 관료주의를, 본질적 측면에서 인간의 자존심을 이야기 한다. 심장병으로 부득이 실업수당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성실한 목수에게 관료 조직은 절망 만을 안겨준다. 신청 절차를 인터넷으로만 받는 공무원에게 시민의 편의는 안중에 없다. 오히려 복잡한 절차를 통해 신청 포기를 유도하는 저의가 숨어 있다. 그런 의도된 불친절에 대항(?)하는 주인공 다니엘(데이브 존스 역)에게 투쟁심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처음에 다니엘은 그런 제도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인터넷 신청을 시도하고, 컴퓨터를 배우고, 이력서 작성하는 강의를 듣고, 그 이력서를 들고 성실하게 동네를 돌았다. 그 성실함에 일자리를 찾기도 했지만, 심장병으로 일 할 수는 없었다. 제도가 개인에게 거짓말쟁이를 강요하는 게 영화 속 현실이다. 



그런 다니엘이 제도에 반항하기 시작했다. 아니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시작했다. 보여주기 위한 증거 수집을 거부하고 수당을 받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 것이다. 대신 그는 낙서를 통해 자신의 뜻을 밝히고 항소를 택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을 아직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보며 비텼다. 


그러나 다니엘에게 허락된 현실은 거기까지였다. 항소 승리를 눈앞에 둔 시점에 그는 심부전으로 죽음을 맞고 만다. 그토록 기다리던 승리가 눈 앞에 있었는데...



영화는 가공의 현실을 반영한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 이루고, 듣고 싶던 말을 영화 속 대사로 위안을 얻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현실을 더 현실감 있게 묘사한 덕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극장 조명이 환하게 켜져도 먹먹함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더 마음이 아픈 건 영국보다 더 한 대한민국의 빈약한 사회보장 현실 때문이다. 영국은 저소득층에게 식료품을 살 수 있게 해주고, 주거비도 지원해준다. 비록 인간의 자존심을 담보로 주는 지원이지만 대한민국에선 들어본 적이 없다. 영하의 추운 날씨만큼 영화의 뒷 맛이 씁쓸하다. 


개인적으로 별 4개 반 주고 싶다. 




LA LA LAND


주변 칭찬이 자자해서 서슴 없이 골랐다. 뭔가 기대엔 못 미쳤지만 그래도 잘 만든 영화라는 데 동의한다.


영화는 배우를 지망하는 여자 주인공 미아(엠마 스톤 역)와 재즈 피아니스트인 남자 주인공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역)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연히 만나 티격태격하며 사랑을 키워간다는 설정은 여느 영화와 비슷하다. 



하지만 다른 영화와 격을 달리 하는 건 기저에 재즈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세바스찬이 미아에게 재즈를 설명하는 장면을 보자. 연주 중간중간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Jam 형식은 뮤지션 간의 대화와 흡사하다고 세바스찬은 말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타협하고 경쟁하는 것이 재즈만의 매력인 셈이다. 사랑도 인생도 그러하다. 자신의 목소리를 타인의 그것과 조화를 이룰 줄 알아야 하며, 불협화음이더라도 서로 부딪혀 가며 낭만을 꽃 피워야 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이별이라 할지라도. 



<라라랜드>는 꿈을 좇고 서로의 꿈이 되어주는 이야기다. 세바스찬의 가난한 뮤지션의 꿈을 미아는 응원해주고, 미아의 무모한 도전을 세바스찬은 아낌 없이 지원해준다. 사랑을 버리고 그 꿈을 이룬 순간, 사랑은 다시 두 사람의 꿈이 되었지만 말이다. 



영화 마지막은 세바스찬의 환상을 보여준다.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현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혼자만의 상상을 해본다. 이 장면은 넣을 필요 없는 영화적 장치였을까? 그렇지 않다. 꿈은 현실이 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일장춘몽 역시 가치있는 꿈이다. 인생 자체가 꿈의 연속이고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 이 영화는 주인공 미키 루크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다. 미키 루크는 80년대 <나인 하프 위크>의 섹시가이 대명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다. 어둠 속에 얼굴 반이 그림자로 드리워진 그의 입체적인 마스크는 남자가 봐도 멋있었다. 그런 그가 이 영화를 통해 다 늙은, 아니 추하게 구겨진,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줘 충격과 감동을 안겨줬다. 충격이라면 생물학적 노화현상일 것이고, 감동이라면 그럼에도 빛나는 삶에 대한 의지를 말할 것이다. 



영화는 미키 루크의 데칼코마니라 할만큼 그의 삶과 유사하다. 80년대의 레슬링 스타 랜디(미키 루크 역)는 두 삶을 살고 있다. 링 안의 삶과 밖의 삶. 링 안에선 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만, 밖에선 딸로부터 외면 받고, 생활고에 찌들린채, 단골 술집 스트리퍼인 캐시디와의 썸만이 유일한 안식처인 독거남이다. 두 삶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지만, 그는 늘 열정적이면서 본능적으로 돌진한다. 그래서 링 위에 오를 때와 식료품 상점에 출근할 때의 그를 비추는 카메라 워크는 똑같다. 그의 육중한 뒷모습을 따라가며 원테이크로 길게 잡는 신은 몇번을 봐도 종교의식같은 장엄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랜디는 링 안팎의 삶을 전투하 듯 살았을 것이다. 


"링에서 모든 걸 잃었고 모든 걸 얻은 나는 레슬러입니다." 



그런 그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은퇴를 결심하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삶에 변화가 오게 된다. 캐시디의 권유로 딸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캐시디와 진전된 사랑을 시도하고.. 시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남은 건 그저 식료품 상점에서 왕년의 스타가 아닌 점원으로 사는 굴종의 삶. 


하지만 랜디는 그런 삶에 타협하지 않았다. 비록 의사의 경고가 있었지만, 심장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다시 링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다. 캐시디와 함께. 영화의 마지막 신은 랜디가 링 위에서 몸을 날리며 끝난다. 이후 암전은 많은 여운을 준다. 랜디가 승리했을 수도, 심장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커튼 뒤에 숨겨진 결과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랜디는 자기 삶에 대해 늘 솔직하게 살아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모습이 아무리 추하다 하더라도 떳떳할 수 있는 것이다. 미키 루크의 흉한 얼굴을 보고 혹자들은 성형 중독자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난 큰 관심 없다. 내 눈엔 미키 루크의 일그러진 얼굴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앞에 나설 수 있는 용기가 더 도드라지게 보일 뿐이다.


뱀발.

사실 레슬링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스포츠라 생각하지 않았다. 스포츠를 가장한 엔터테인먼트라 여겼다. 그래서 단체명이 WWF가 WWE(entertainment)로 바꿨을 때 솔직한 인정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엔터테인먼트라 할지라도 그 속엔 치열한 삶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평가들의 평점이 높은 영화는 왠지 부담스럽다. 

과연 나도 비평가 수준의 안목을 가졌을까 혹은 비평가들이 좋다고 하니 따분하지 않을까 하는 등의 선입견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

따분하지 않을 만큼 재미 있고, 지루하지 않을 만큼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별 4개 주고 싶다, 아낌없이.



우선 이 영화는 마초적인 냄새가 곳곳에서 짙게 배어난다. 비중있는 캐릭터는 죄다 남자들 뿐이며, 영화를 관통하는 코드는 가족에 대한 남자의 책임감이다. 게다가 총이 등장하고 무대는 텍사스다. 어디선가 말보로 담배를 피우는 카우보이가 튀어나올 듯 하다. 실제로 카우보이 복장을 한 전형적인 텍사스 마초들이 이 영화를 끌고 나간다. 


등장하는 두 인물은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와 형 태너(밴 포스터). 대출금을 갚지 못해 은행에 집과 땅을 넘겨줄 위기에 처한 토비가 출소한 태너와 함께 은행털이를 시작한다.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작은 은행의 지점을 습격하고 큰 돈은 가져가지 않는 수법을 쓴다. 덕분에 연이어 성공하지만, 베테랑 레인저인 마커스를 만나면서 상황은 추격전으로 바뀐다. 다음에 털 것으로 예상되는 은행으로 달려가는 레인저들과 형제는 총격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형 태너는 마커스의 총에 죽고 만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태너의 선택. 동생을 위해 자신이 기꺼이 레인저들을 유인하고 담담하게 최후를 맞는다. 전적으로 동생을 위한 형의 고독한 결정이다. 토비 또한 그러하다. 은행 턴 돈으로 대출금을 모두 갚자 아낌 없이 집과 땅의 명의를 아들에게 돌리고 자신은 그 집을 출퇴근하며 지키는 역할에 만족한다. 이혼했지만, 아들을 위한 아빠의 고독한 결정이다.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남자의 모습이 박물관의 박제처럼 쓸쓸하게 그려진다. 


토비의 대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비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건 아닐런지. "가난은 전염병 같아서 대를 이어 전해지죠. 하지만 내 자식들은 안돼요."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영화에서 꼬집는 미국의 현실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 총기, 추억을 곱씹으며 마을을 지키는 노인들, 그리고 은행과 석유회사라는 거대한 자본에 착취당하는 토착민들의 삶까지 뭔가 황량한 벌판처럼 답답하다. 폴폴 날리는 먼지는 켜켜이 쌓여간다. 저물어가는 미국을 상징한다. 은행털이에 사용했던 차들을 땅속에 묻는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레인저 마커스가 동료 알베르토에게 날리는 인종차별적 농담도 사실 미국 백인의 속내를 대변한다. 도덕적 양심 혹은 어디서든 날아올 수 있는 총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금기어들이 마커스를 통해 쏟아진다. 


며칠 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의 누적된 언행과 경력을 감안할 때 의외의 결과로 여겨지지만, 이 영화의 저변에 깔린 정서를 보면 그릴 놀랄 일도 아니지 싶다.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준 것도, 자존심을 세워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트럼프는 자신들의 정서를 충족시켜 주는 대리인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했을 테다. 아마도 비평가들은 이런 잔잔한 현실 풍자와 서부 영화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높은 점수를 주는 듯 하다. 내 기대와도 크게 어긋나지 않았고. 


이 영화의 원제는 미국의 오늘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Hell or High Water.



오랜 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지인의 소개로 보게 된 '라이프 오브 파이'.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는 이 영화를 어드벤처로 분류했다. 외견상 그럴 수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정확히는 휴먼 드라마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물론 휴먼 드라마라는 분류는 없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과 또 자연을 극복해내는 인간의 강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에 어드벤처라는 분류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는 해석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예술 아닌가. 



우선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키워드는 두가지다. 바로 사건과 기억. 사건은 객관적인 현실이지만, 기억은 사건을 주관적으로 내면화한 또 다른 현실이다. 눈 앞에서 벌어진 현실과 그걸 머릿 속에 저장한 기억은 매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일수록 일치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엄청난 충격에 대한 방어기제가 스스로 발동되는 탓에 기억이 조작되기 때문이다. 이 조작이 대중에게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 종교적인 영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파이를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종교관을 갖고 있는 인물로 묘사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렇지 않고서 수 백 일을 태평양에서 버텨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파이는 자신의 경험담을 아름답게 포장한 '기억'에 의존하여 풀어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갈 무렵 기억을 배제한 사건도 들려준다. 뜻밖의 반전에 관객은 충격을 받지만, 파이는 관객에게 묻는다. "Which story do you prefer?" 인생에 정답은 없다. 사건과 기억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주인공 이름 파이다. 원래 이름인 피싱이 발음상 불결한 탓에 갖게 된 별명 파이는 원의 지름에 대한 원 둘레의 비율, 즉 원주율을 뜻한다. 피싱이 학교에서 무한대 숫자인 원주율의 수 백 자리를 외워 얻게 되지만, 파이는 무한히 반복되는 인생사를 뜻한다. 파이를 수로 표현할 때 3.14라고 하지만, 3.14는 말 그대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정의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이다. 유복했던 가정환경에서 자란 파이가 동물원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이민 가게 된 것도, 도중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된 것도, 천신만고 끝에 멕시코 해안에 다다르게 된 것도 모두 끝을 알 수 없는 인생 파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원작자 얀 마텔은 수학에 강한 인도인의 특성도 물론 감안했을 것이다. 


또한 바다에서 같이 표류하는 인간과 호랑이를 현실감있게 그려낸 감독의 능력 또한 충분히 감탄해줘야 한다. 비현실적인 무술동작을 현실감있게 담아낸 와호장룡의 이안 감독이라면 역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철학적인 원작과 탄탄한 시나리오, 그리고 이를 아름답게 그려낸 영상미가 두 시간 넘는 영화를 십 분처럼 느끼게 했다. 



사람의 홍채는 지문과도 같아 누구와도 겹칠 수 없다.

그러나 홍채가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면, 이는 통계의 오류일까? 

아니면 과학으론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 때문일까?


영화 'I Origins'는 두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과학과 종교의 경계를 넘나드는 질문을 던진다. 우선 첫번째 주인공인 이안은 논리적이고 지적인 홍채 전문 과학자다. 이안은 진화과정에서 홍채의 패턴을 만들어내는 어떤 요소들을 이용해 눈이 없는 생물에 시각을 부여하여 창조론의 존립기반을 깨뜨리고 싶어 한다. 그리고 실제 실험으로 이를 증명해낸다. 그리고 두 번째 인물인 소피. 소피는 정형화되지 않은 도발적인 매력을 지녔다. 아르헨티나에서 자라 라틴계의 느낌을 지닌 그녀는 순탄하지 않은 가족사를 겪었다. 이안과의 만남을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인연으로 여길만큼 과학적인 사고방식과도 거리가 멀다. 아니 과학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살고 있는 도시 빼곤 공통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현상에 이끌려 만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비극적인 엘리베이터 사고로 소피가 죽게 되면서 끝을 맺는다. 아마도 이안에게 소피는 한바탕 퍼부은 소나기 뒤에 떠오른 무지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할로윈 파티에서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 소피의 눈과 비슷한 광고사진, 연속되는 특정한 숫자 11, 그리고 11을 따라가다 지하철에서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확률적인 통계론 설명이 무의미하다. 규명할 수 있는 데이터만을 중시하는 이안에게 벌어진 기이한 사랑이라니 더욱 아이러니하다. 하긴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게 사랑일 테지만..



이안의 삶속에서 사라진 소피는 7년 후 홀연듯 다시 나타나게 된다. 후배 연구원 카렌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안의 아기가 자폐증으로 의심된다는 병원의 연락이 오고 부터다. 병원에서 실시한 자폐증 검사방식에 의문을 품었던 이안과 카렌은 과학자답게 검사의 진의를 알아낸다. 그건 자폐증 검사가 아닌 홍채가 같은 두 사람의 연관성을 실험했던 것. 아기가 태어나기 바로 전 아기와 같은 홍채를 가졌던 사람이 사망했던 점에 주목해 병원은 아기에게 그 죽은 사람에 관한 사진을 보여주고 반응을 살폈던 것이다. 아기는 놀랍게도 죽은 사람과 관련한 사진에 웃고 우는 반응을 보였다. 이 때부터 이안과 카렌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가설, 즉 윤회설에 눈을 뜨게 된다. 물론 합리적인 의심의 영역에서 말이다. 


이제부턴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원치 않으면 이전 페이지로 이동하시길 권한다.


그러던 중 소피와 같은 홍채를 지닌 사람이 인도에 실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안은 고민 끝에 찾아 나선다. 아마도 두가지의 호기심이 이안을 인도로 이끌었을 것이다. 윤회설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고픈 이성적 호기심과 옛 사랑을 직접 확인하고픈 감성적 호기심.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찾은 대상자가 유의미한 실험 결과로 나오지 않자 크게 실망한다. 그런 그에게 펼쳐진 반전은 바로 대상자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여준 반응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대상자는 극심한 공포감에 이안에게 안겼던 것이다. 그리고 대상자의 눈을 바라본 이안은 꼬마에게서 소피의 눈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우는 대상자를 안고 계단을 내려가는 이안이 대상자와 문을 열고 나서는 것으로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대상자는 소피와 같은 홍채를 지닌 7살 여자 아이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왠지 소피와 묘하게 일치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영화는 굳이 윤회설을 얘기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과학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그냥 이안이 연구했던 눈 속에서 진화론의 증거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도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되 계몽적이지 않은 영화는 늘 박수의 대상이다. 게다가 짙은 여운의 결말로 보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준다면 기립박수도 아깝지 않다. 'I Origins' 이 영화가 바로 그런 영화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를 본 후 떠오른건 인생무상이었다. 계급갈등을 뚫고 일궈낸 통쾌한 승리를 기대했던 나로선 당황스러운 결말이다. 하지만 이 당황스러움은 실망이 아닌 신선한 충격에 가까웠다. 봉준호 다운 반전이랄까? 역시 거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덕분에 엔딩 크레딧이 오른 후에도 한참 동안 영화 메시지를 곱씹을 수 밖에 없었다.


영화는 빙하기에 처한 세상에서 노아의 방주 같이 달리는 기차를 배경으로 한다. 그 안에는 열차 칸마다 구분된 계급이 설정되어 있다. 노예와 비슷한 꼬리칸의 승객들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한칸 한칸 앞으로 전진한다. 이쯤 되면 영화의 결말은 대략 견적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상투적인 권선징악을 거부한다. 인간의 선과 악 혹은 사회의 안정과 혁명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진다. 악으로 여겨졌던 윌포드의 사회를 향한 고민이나, 선으로 여겨졌던 커티스의 과거 모두 충격적이다. 이 시점에서 관객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윌포드라면, 내가 커티스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쉽지 않다.


이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연기를 보여준 틸다 스윈튼


이 영화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과 상당히 비슷하다. 소재가 기차와 우주선으로 갈릴 뿐, 영화적 상상력이나 메시지는 도플갱어다. 질서가 잡혀있는 안정된 세계와 그 틀을 깨기 위한 노력이 부딪쳐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 혹은 새로운 창조물은 정반합(正反合)의 원리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에서 정(正)을 윌포드와 길리엄으로, 반(反)을 커티스로 본다면, 합(合)은 요나다. 특이한건 정(正)에 해당하는 윌포드와 길리엄이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상극이면서 동시에 한몸이었다는 점이다. 이건 막바지에 영화를 미궁에 빠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반면 합(合)인 요나는 정(正)과 반(反)의 요소를 모두 갖춘 새로운 결합체다. 기차에서 태어난 까닭에 지구를 경험하지 못한 요나는 기차의 질서에 익숙한 정(正)이며, 어쨌든 반란세력에 합세한 역할은 반(反)에 해당한다. 그러나 요나는 기차를 벗어나 새로운 지구에 발을 내딛어 합(合)으로 승격되는 운명을 맞는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요나가 합(合)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 어차피 역사에서 우연과 필연은 종이 한장 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 아쉬운건 각 등장인물의 복잡한 과거들이 상당 부분 대사로 풀어진다는 점이다. 영상으로 노출되는 소품이나 상징 등으로 암시를 해줬더라면 관객들을 더 큰 충격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을텐데.. 하긴 그런건 '괴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강에 괴물의 등장 이유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밝혔더랬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의 스타일이기도 하고. 


한번쯤 사회와 인간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은 사람에겐 강추, 적당히 잔인한 봉준호 스타일의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에겐 비추. 



홍상수 영화는 묘한 매력이 있다. 영화는 대사의 힘으로 끌고 나가면서 카메라의 역할을 굉장히 제한적으로 배치한다. 그런데 그 투박한 카메라가 주는 맛이 뭔가 상징적이라고 할까? 압축적으로 전달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는 안개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 배경인 남한산성의 안개처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생활의 발견'과 비슷하다. 어딘지 불안한 남녀관계를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본다. 영화 내내 그렇다. 딱히 줄거리랄 것도 없다. 당연히 결론도 애매하다. 누군가 술자리에서나 얘기했음직한 그런 평범한 이야기를 영상에 담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어떤 영화였는지 생각해 보면 딱히 떠오르는 이야기는 없다. 그냥 이미지만 남는다. 대사는 감칠맛 난다. 세련된 감치미는 아니지만 그냥 잔잔한 그러나 너무 일상적이어서 또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는 모두 유부남을 사랑한다. 정은채도 그렇고 예지원도 그렇다. 어쩌면 그런 처지라 동변상련의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둘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을 소유하긴 어렵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남한산성과 비슷하다. 사랑은 하지만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일정 부분 숨기고픈 안개 속 사랑이다. 정은채는 엄마의 캐나다 이민으로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되고 사랑에 대해 실체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의 결심이 교수에겐 부담이 되고 결국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만다. 반면 7년간 유부남과 사랑해 온 예지원은 그런 처지를 아쉬워하면서도 막상 그 연을 끊지 못한다. 결국 평범한 행복은 갖기 어렵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여자 이미지는 대개 이러하다. 


반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이선균, 유준상은 현실적이다. 가정과 사랑 모두를 지키고 싶어 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버릴 생각이 없다. 가끔씩 그런 일상을 탓할 뿐,  그걸 깰 용기도 없다. 그래서 자신과 은밀한 관계 속에 머물러 있던 정은채가 관계정리를 요구했을 때, 그는 당혹감에 목놓아 울었던 것이다. 어떤 것도 스스로 깰 수 없는 상황에서 깨질 수 밖에 없는 현실에 그는 무기력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선균은 이중적인 욕망도 한껏 드러낸다. 정은채가 다른 남자와 사귀었던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막상 정은채가 두사람의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땐 극도의 분노를 폭발시킨다. 사랑에 대한 독점욕과 교수직에 대한 명예욕과 가정유지라는 현실적인 생활욕을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성인들을 위한 성장통 영화 같은 느낌이다. 성장통이 사춘기에만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듯 하지만, 사실 연습 없는 인생은 늘 몸으로 부딪치며 깨달으며 살 수 밖에 없는 법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사랑이 없을 것 같은 나이에 사랑은 찾아오고, 이별은 생각지도 않게 닥치게 된다.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영화도 그런 사랑을 관조적으로 보여줄 뿐 어떤 결론도 내놓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은 현실과 꿈의 애매한 경계선에 서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영화 마지막 꿈에서 깨어난 정은채처럼.



그토록 벼르고 벼르던 영화 '인셉션'을 봤습니다. 보는 내내 머리속에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의 두뇌싸움에 시간가는줄 몰랐네요. 2시간 반이 마치 1시간 밖에 안지난 것 같습니다. 그만큼 몰입도도 높고, 스토리 구조도 탄탄하고, 연기도 훌륭한, 보기 드문 수작이 아닌가 싶네요. 어쩌면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다시 한번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놀란 감독이 낸 퍼즐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거든요.

영화는 예전에 책으로 접했던 장자, 프로이트, 그리고 수업시간에 들었던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등을 떠올리게 하네요. 그 철학적 연관성에 대해 뚜렷한 관점을 갖고 있지 않기에 영화의 내면적 재구성이 힘들긴 하지만, 인터넷에 오른 여러 비평들을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그 고리의 연결구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아는 만큼 세상은 보이네요. 지적 호기심을 무한자극하는 놀란 감독님... 놀랍습니다. 
우선 영화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 마지막 장면, 이게 과연 꿈인가 현실인가 하는 부분은 말 그대로 여운으로 남겨둘 수 있는 장면이겠지만... 감독의 의도가 꿈과 현실을 오가는 가운데 상상적 자아와 실체적 자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거라면, 굳이 꿈 혹은 현실이라고 결론맺는 것은 의미없다고 봅니다. 그야말로 관객들의 해석영역으로 남겨두는게 현명하겠죠. 그보다 더 중요한건 과연 인간의 무의식과 의식과의 관계는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모든 것에 의심을 품은 데카르트가 발견한건 의심하고 있는 자아의 확실성이었습니다. 방법론적 회의라고 수업시간에 배웠죠. 그건 한마디로 이성이 작용하는 자아, 즉 의식세계에 주체적 지위를 부여한겁니다. 하지만 프로이트, 라캉 등으로 넘어오면서 의식은 무의식에 의해 조종되는 하나의 객체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게 바로 그 이론이죠. 무의식의 공간에 어떤 하나의 생각의 씨앗을 심으면 Inception, 추출하면 Extraction 이라고 하는데요. Inception을 통해 무의식 세계에 뿌려진 씨앗이 의식세계를 지배하게 되고, 나아가 그 사람의 자아를 형성하는 도그마가 되는겁니다. 단 전제조건은 무의식에 단초를 심는 과정을 의식세계가 인식하지 못해야 효력을 발휘하는건데요. 그건 의식세계는 무의식세계에 침투하려는 생각을 제거하려는 습성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만장자 상속자 피셔 쥬니어의 꿈속에서 인식체계를 지키려는 피셔 쥬니어 인식의 공격을 받게 되는거구요. 마치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면역체계가 발동하는 것처럼 말이죠. 영화 대사에서 그걸 암시하는 말이 나옵니다. 가장 강력한 바이러스는 생각이라고... 참고로 이 영화는 그냥 허투루 만든 대사가 없더이다...

이런걸 감안하면, 어렸을 적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 소름끼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의식과 자아를 지배하는 무의식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경험같은 감성적인 환경에 의해 조성되기 때문이죠. 결국 무의식 세계에 자리잡은 특정 기제가 의식세계를 리모콘으로 작용한다면, 그 사람을 노무현으로도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전두환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얘기인데요. 그렇다면 결국 지금 살고 있는 현실세계의 우리는 무의식에 의해 움직여지는 아바타가 되는건가요? 또 이론의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는 호접몽에까지 이를 수 있는건가요? 참 오묘한 심리학의 세계입니다. 

영화에서 꿈은 5단계로 이루어집니다. 근데 영화를 한번 봐서는 단계별 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좀 헷갈립니다. 첫 장면에 나왔던 사이토의 꿈이 어디에서 연결되었던건지도 명확치 않구요. 따라서 영화를 한번 더 봐야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물론 인터넷의 글들을 좀더 검색하면 분명해지겠지만, 이 영화만큼은 타인의 시각에 의지하고 싶진 않더군요. 그만큼 매력에 풍덩 빠진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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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영화가 맘에 드는 또 한가지, 악당이 없다는 점입니다. 천편일률적인 선과 악의 대립구도(람보, 공공의 적 등)는 말초적인 자극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끝모를 적개심과 통쾌함을 가장한 권선징악만 나열하는 유치한 이야기죠. 반면 이 영화는 꿈과 현실, 그리고 꿈 속의 꿈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이 헤쳐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대개 선과 악은 한 인물안에 공존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죠. 그렇기에 주인공인 레오나드로 디카프리오(코브 역)가 법률상의 범법자 신분에서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르거나, 와타나베 켄(사이토 역)가 국경을 넘어서는 초법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부분 등은 이 영화에선 중요하지 않습니다. 

'셔터 아일랜드' 이후 또 한편의 영화다운 영화를 봐서인지 주말 오후가 풍족해졌네요. 최근 방콕같은 날씨에 지쳤는데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를 맞은 느낌입니다. 서둘러 포스팅 마무리하고 수영이나 하러 가야겠습니다. 뇌속에 무의식이 수영복을 챙기라는 명령을 내리네요. 수영장의 매출을 올리기 위해 누군가 내 머릿속에 inception을 한건지도... 모르겠... 음... 그렇담 토템을 돌려봐야 하나요...?


회사 동료가 '셔터 아일랜드'를 보면서 내가 생각났다고 하더군요. 워낙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다보니, 딱 우모스타일이라고 본거죠. 예전에 '아이덴티티'에 대해 극찬을 했던게 기억났나 봅니다. 안그래도 '셔터 아일랜드'는 극장에서 꼭 보려했는데요. 기회를 놓치다 이제사 봤네요. 예상했던대로 명장 스콜세지 감독의 연출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구요. 인상깊었습니다.

영화는 정신병동에서 환자가 사라진 사건을 연방수사관이 투입되면서 시작됩니다. 연방수사관은 디카프리오구요. 촌스런 넥타이를 달고 나옵니다. 의욕적인 수사는 병원 관계자들의 드러나지 않는 비협조 속에 미궁에 빠지는데, 사라졌던 환자가 나타나면서 사건은 종결되는 듯 하죠. 하지만 디카프리오가 이 섬에 품고 있는 의문, 이 병원에서 조직적으로 뇌에 대한 생체실험 의혹을 파헤치고, 자신의 아내를 죽게 만든 방화범을 만나기 위해 섬을 수색합니다. 이 와중에 디카프리오는 여러가지 환영을 보게 되는데, 자신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의 참혹했던 광경,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 가족이 죽게되는 장면이 어지럽게 펼쳐집니다.

대략 이 즈음에서 영화에 대한 반전이 대충 그려지긴 했습니다. '아이덴티티'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거든요. 주인공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가지만, 결국 자신이 그 문제의 해답이라는 설정... 다만 '셔터 아일랜드'는 '아이덴티티'와는 달리 고립된 섬과 정신병원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 개인이 하나의 객체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구분됩니다. '셔터 아일랜드'의 디카프리오는 한 인간이 권력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되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죠. 여기에서의 인간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고와 행동은 차단된 채, 사회권력체계에 훈육되고 길들여진 부속품같은 존재입니다. 의사와 환자, 지시와 복종을 상징하는 정신병원의 고압적인 건축물이 그렇구요. 환자들에게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각 병동과 등대, 동굴 등도 개인의 자유로운 왕래와 사고를 차단하는 구조주의가 기저에 깔려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의 방어기제로서 없는 환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간는 것, 또한 눈여겨볼 만 하죠. 마치 수조 속에 갇힌 물고기가 아직 바다에서 살고 있다고 자기체면화하는 듯한... 적당한 비유일런지는 모르지만,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디카프리오가 전쟁경험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가정 파괴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를 연방수사관 테디라는 가공의 인물로 스스로를 설정한 것은 차라리 애처로웠습니다. 한편 이해가 가기도 하구요. 하지만 정작 우모를 놀라게 한건 그의 마지막 대사였습니다. 그는 정신이상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미친 척 했을 뿐... 

'당신이라면 어떻게 선택을 하겠는가? 괴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좋은 사람으로 죽을 것인가?'

영화 끄트머리에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했기에 정신병원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에도, 마지막 순간에 주치의에게 자신의 환상을 지키겠다고 선언한 디카프리오. 스스로 괴물임을 인정한다면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 수는 있겠지만, 그러느니 차라리 가공의 자아로 남아 죽음을 택하겠다는... 어떻게 보면 구조에 저항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여겨지네요. 그러고보면 '올드보이'의  최민수가 최면을 선택하여 과거를 지우고 딸을 취한 것도 현실을 수용할 수 없는 인간의 고뇌였던 겁니다.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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