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라는 캐릭터가 워낙 독특해서인지, 이외수의 글을 읽으면 마치 그 분이 옆에서 읽어주는 듯합니다. 그 특유의 목소리로 말이죠. 특히 이 책은 좌절하고 있는 청춘들에게 전하는 충고의 글인지라, 더더욱 그런 느낌이 묻어나네요. 

'청춘불패 : 이외수의 소생법'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 백조면 어떠하고 오리면 어떠한가, 제2장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아픔을 느낀다, 제3장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리고 제4장 그대가 그대 인생의 주인이다... 요즘 같은 백수가 넘쳐나고 취업도 어려운 청춘 좌절기에 적절한 위로주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누구나 젊은 사람 혹은 후배에게 '인생은 말야... 이렇게 살아야돼...' 라고 어줍쟎은 한마디 할 수 있죠. 자기가 살아오면서 성공했기에 혹은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실패한 경험도 유용한 교훈꺼리가 되니까요.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냐의 문제는 좀 별개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조언자의 살아온 배경도 있어야 하구요. 충고의 진정성도 담겨 있어야 되죠. 전혀 고민 안해본 사람이 들려주는 충고는 그냥 다른쪽 귀로 흘러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기획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죠. 이외수야 말로 아웃사이더에서 홀연히 성공스토리를 써낸 기인이니까요.

산은 정지해 있으되 능선은 흐르고 있고, 강은 흐르되 바닥은 정지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메모해 놓은 괜챦은 구절입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강은 강이 아니라는... 알 듯 모를 듯 심오한 글을 곱씹으면서 최근의 주변상황도 돌아봤네요. 그리고 이외수의 기가 몸속에 파고든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꼭 청춘이 봐야한다기 보다 가슴속에서 청춘을 꺼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봐야하는 책이지 싶네요.


서점에서 재미있는 책이 어디 없을까 둘러보다 왠지 끌리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라는 책인데요. 사실 역사서는 정사보다는 야사가, 구조적인 관점보다는 개인적인 관점이 더 솔깃하거든요. 신빙성 여부를 떠나 일단 재미있죠.  이 책도 그런 범주겠거니 하고 집어 들었습니다. 일단 책은 재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심리적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도 의미가 있지 싶네요. 먼 훗날 노대통령과 2mb의 대립을 이런 식으로 풀어도 괜챦을꺼 같습니다. 


우모는 그간 사람의 유형을 혈액형으로 분류하는데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수십억의 사람을 단지 4가지 기준으로 줄세운다는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그런 분류법은 심지어 히틀러적인 발상처럼 느껴지기도 했죠. 이 책의 기준은 4가지보다는 많습니다. 16가지인데요. 내향(I)-외향(E), 감각(S)-직관(N), 감정(F)-사고(T), 실천(J)-인식(P) 등으로 분류했습니다.

저도 예전에 회사에서 실시해서 테스트해봤는데, ISTJ형으로 나왔던 기억이 있네요. 책에서 보니 ISTJ가 모범생 부류라고 하던데, 맞는건지 아닌지 고개가 갸우뚱했었습니다. 그래서 16가지 분류법이 실제 성향과 부합한다기보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구나 정도로만 인식했더랬죠.

이 책은 그 기준에 입각해서 인물을 분석하고, 인물을 둘러싼 주변을 해석하고, 역사를 들여다 봤습니다. 사실성 여부를 떠나서 인물의 성장환경은 꽤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공감할만 하더군요. 특히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한 정조의 개혁성, 불우한 환경으로 인한 연산군의 기행은 충분이 납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성향 분류법의 정확성에 집착한 나머지, 결과론에만 치우친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차피 과거의 기록에 근거해서 책은 씌어졌을테고 기록에서 인물의 성향을 뽑아낸다는건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행간의 의미란건 자의적일 수 있구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역사를 보는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도 비판할 수 있구나, 저렇게도 해석할 수도 있구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많이 달라질 수 있는 역사는 그래서 재미도 있고, 논란이 되는 것 같네요. 지금의 현실은 미래의 역사에서 어떻게 바라볼런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인간 본성에 차별화(Differentiation)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하죠.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무엇, 이런게 경쟁을 유발하여 선의의 발전으로 이어지면 괜챦은 구도가 되는데요. 역으로 타인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구도로 간다면 역사는 퇴행하게 됩니다. 비견한 예로 히틀러의 인종주의나 한국의 지역감정... 등이 있겠죠. 세상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미국에는 흑백갈등이 있습니다. 


이 책은 흑인으로 흑인차별이 횡행하던 1959년 분장(?)한 백인이 남부를 여행하면서 겪는 이야기입니다. 분장이 단순한 데코레이션이 아닌 의학적 시술에 의한 피부탈색이구요. 이 모험을 감행한 사람은 존 하워드 그리핀입니다. 직업은 뭐 다양해서 하나만 집어 말하긴 어려운데요. 소설가겸 작가이자, 사진작가이고, 음악학자이기도 하다네요. 중요한건 그가 인종차별을 몸소 체험하고 그 부당성을 알렸다는 측면에서 인종철폐주의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느꼈던 센세이셔널한 체험담은 그닥 관심에 있지 않았습니다. 백인인 그가 흑인이 되어 겪었던 쇼킹한 일들은 황인인 나에게까지 쇼킹한건 아니니까요. 그냥 그렇겠거니 인지하는 정도일 뿐입니다. 오히려 더 심한 체험담도 책으로 봤었죠. 흑인소녀가 백인학교에 입학하면서 겪게 되는 비참한 체험이야기... 실화여서 더욱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전 이 책이 내리는 결론이 집중했는데요. 결론적으로 그리핀은 1959년 10월 28일 여행을 시작해서 12월 15일에 마쳤습니다. 여기서 여행을 마쳤다는건 다시 의학적으로 백인으로 돌아간걸 의미하겠죠? 그의 생생한 경험담은 당시 미국이 인종차별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자위하던 주류사회에 경종을 울렸구요. 진정한 역지사지 입장에서 구술한 책으로 평가받아 지금까지 고전으로 뽑힌다고 하네요. 특히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더 주목받는게 아닌가 싶습니다요. 

이 책이 주는 결론? 그런거 없습니다. 걸리버 여행기보다는 현실적이지만, 타자로서의 자아가 경험한 사회와 자아로서의 자아가 경험한 현실은 분명 다르니까요. 다만 그동안 애써 눈감아 왔던, 모른체 해 왔던 현실에 경종을 울렸구요. 흑인과 백인은 피부색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인간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준 것 뿐입니다. 썼기는 이렇게 썼지만 그렇게 자신을 일시적이나마 실험대상으로 써가며 진실알리기에 나선 용기와 지혜는 감탄스럽습니다. 백인이 구축해 놓은 사회구조에 적응하기 위해 수동적이면서 미련하고도 온순한 흑인상에 가깝게 스스로 행동하는 것, 역시 장기적으로 왜곡된 흑인 이미지 고착화에 기여한다고 지적한 점이 인상적이네요.

돌아보면 우리도 예외는 아니죠. 특정 지역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도 그렇구요. 통일 이후 닥칠 남북 주민간의 차별화(Differentiation)도 걱정됩니다. 신해철인가 그랬다죠? 연변의 조선족 중 상당수가 독립투사의 후손인데 한국에 와서 천대받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그렇죠. 사실 국내에서 친일파면서 떵떵거리는 후손들 아직도 있으니 뭐... 쩝...

하여간 선입견 없이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 어렵지만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잠실로 와서 좋은 유일한 점은 대형서점이 빌딩 안에 있다는 겁니다. 분당이 신체적으로 리프레시할 수 있는 여건이 잘 갖춰져 있다면, 여기는 대신 정신적인 여유를 즐길 곳이 많이(?) 있거든요. 사실 운동할 수 있는 인프라가 약하기 때문에 억지 춘향격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쿨럭... 어쨌든 그나마 이런 혜택이라도 있는게 어디야...? 하는 심정으로 책을 집어들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의 여유란게 기껏해야 30분 정도라서 어려운 책을 읽기는 힘들구요. 일단 가볍게 시작한다는 면에서 재밌는 소설부터 읽고 있습니다. 다독을 즐기는 모 블로거님 서평을 볼 때마다, 개인적으로 감탄을 하곤 하는데요. 최근 책과 멀어졌던 자신을 반성하며 30분이라는 미미한 시간이나마 투자해볼까 합니다. 가뜩이나 머릿속에서 나가는건 많은데 들어오는게 없어서 가끔씩 답답하기는 했습니다.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서점안에 사람들이 더 많네요.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권에 이어 2권을 읽었습니다. 1권이 시골의사 자신이 봤던 이야기들이라면, 2권은 자신과 연관되어 있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썼더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책을 잡은지 두어시간만에 한달음에 읽어 제꼈으니까요.

2권은 1권과 유사한 톤으로 씌여져서 특별히 새롭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코멘트를 추가할 것도 별로 없구요. 우리 주위에 드라마틱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 그리고 시골의사의 말대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져봤습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사는게 누구나의 꿈이지만, 누구나의 소유물은 아닌 듯 싶네요. 사랑이 그렇게 쉽게 만져질 수 있도록 널려 있는거라면 드라마에서 허구헌 날 사랑타령은 하지 않을꺼니까요. 그렇다고 사랑이 밤하늘의 별처럼 먼나라의 얘기도 아니구요. 주위를 돌아보는 따뜻한 시선만 있으면 언제든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 시선을 갖기엔 우리의 이기심이 워낙... 음...

읽고나면 기분좋은 책이 있는 반면, 읽고나도 착잡해지는 책도 있죠.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은 두가지 느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따뜻해지면서도 먹먹해지는...


주식 투자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유명한 시골의사 박경철씨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주식에 그닥 관심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의사가 주식을 한다는 자체도 그닥 좋아보이진 않았던게 사실이었거든요. 의학을 돈버는 데만 사용하는 일부 의술쟁이들에 대한 환멸 때문이랄까요. 의사가 주식투자 도사가 되었다는건 선생님이 과외로 돈벌이 한다는 것처럼 세속적으로 느껴지더라구요. 실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그 연장선으로 이해했던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은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책을 읽다보니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던게 부끄러워지더군요. 적어도 그는 약자에 대한 연민에 고민해왔다는걸 알게 되니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구요. 더불어 이웃에 대한 사랑, 주변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더군요. 책을 읽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슴 뭉클한 다큐멘터리를 본 듯한 경험이었습니다. 한번쯤 보셔도 좋을듯 싶네요.

책은 의사를 하면서 겪게 되는 환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정확히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 관심을 가지라는 외침이죠. 돈이 없어서 수술을 받기 힘든 사람, 나병환자라는 죄책감에 말기암이 되도록 병원을 거부하던 할아버지, 치매로 자신이 사랑하는 손자를 죽이게 된 할머니 등 그늘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너무 담담한 필체 때문에 슬픔이 더욱 커지는 느낌이네요.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는 수십년간 앞만 보고 달려온 탓에 뒤쳐진 사람들에 대해 멸시와 냉소를 보냈던게 사실입니다. 구조적인 모순으로 낙오자가 되었지만, 모든건 그 개인의 능력부족으로 돌려버리고 무관심해왔죠. 산업화의 병폐라고 할 수 있는데요. 같이사는 사회를 만들기에는 아직도 대한민국은 성공신화만 꿈꾸며 미친듯 달리고만 있습니다.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말이죠. 남이야 어찌됐든 성공만 하면 되고, 도덕성이야 누가 뭐래고 하든 돈만 잘벌면 대접받는 사회가 현재 우리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청와대에 살고 있는 사람부터 대표적인 케이스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병원 르뽀 프로그램과 다른 시각에서 그늘진 사람들에 대한 이면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이게 과연 한국의 현실인가 싶기도 하구요. 아직은 따뜻한 손길이 많이 필요한 대한민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보는 의료보험체계의 비현실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는데요. 하루키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독특한 시각으로 잘 쓰는 스타일인지라 매번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많이 느끼게 합니다. 그게 아마 문장력이 아닌가 싶은데요. 같은 글을 써도 어렵게 풀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참 편하게 전개하는 사람이 있죠. 하루키는 분명 후자에 속하는 사람일겁니다. 

이 책도 역시 예외는 아니더군요. 좀 특이해서 이게 소설인가? 싶은 생각도 들구요. 뭔가 끝맺음이 없는 단편영화를 보는 듯한... 독특한 문장력... 하지만 재미는 있네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책 서두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이야기나 들었던 실화를 옮겨적는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스케치'라고 표현을 했는데요. 미술작품을 완성하기 전 기본 뎃생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굳이 완결짓지 않더라도 토막토막 끊어진 구조에서도 충분히 작가의 감정은 전달되는 것 같네요.

이 책에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나옵니다. 관통하는건 사랑인데요. 이룰듯 이루지 못하는 사랑, 그것도 약간은 뒤틀어진 사랑들이 나옵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도 약간 거시기한 감정들도 있구요. 기억에 남는건 묘한 이유로 인해 이혼을 선언한 일본 중년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혼자 독일여행을 갔다가 남편을 위해 '레더호젠'이라는 반바지를 사는 과정에서 이혼을 결심하는데요. 그 이유가 이해갈듯 말듯 하네요. 남편과 비슷한 체형을 지닌 사람이 레더호젠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남편에 대한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이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품처럼 끓어올랐다고 하던데... 아마 자신이 막연하게 느껴왔던 남편에 대한 거부감이 레더호젠을 통해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게 아닌가 추측됩니다만...

순간 티셔츠건 바지건 항상 직접 사왔던 내가 고마웠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소설을 읽기 전에 소설가의 성향을 보면 대충 어떤 스타일일지 짐작할 수 있는데요. 다른 작가들에 비해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는 과학적 호기심을 지적으로 자극하는 이야기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의 문학화'라고 해야 될까요? 과학을 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조련하는 솜씨가 예사스럽지 않죠.


파피용...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그의 포스가 책 첫 페이지에서부터 물씬 풍기더군요. 과거 뇌에서 받았던 충격을 기대하며 책을 읽어 내려 갔습니다. 그런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늘 기대치를 훌쩍 넘어 버리는 그의 능력에 박수를 보낼 뿐입니다.

이번에는 인간과 우주의 탄생이라는 매우 탐색하기 어려운 주제를 삼았네요. 현대과학이 빅뱅이론으로 우주 탄생의 비밀을 얘기한다면, 베르베르는 인간의 능동적인 탐험에 의한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소재가 그러하듯 이야기도 일면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우주의 정착지를 향해 14만 4천명이 우주선을 타고 1000년 동안 우주여행한다는 뼈대는 그 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시켜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죠. 우주선 안에 중력을 만들어 정상적인 도시생활을 영위하게 한다는 점, 지구를 떠난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동참하는 14만명, 그 14만명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규모의 우주선, 그리고 그 우주선을 조종하는 돛대 등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설정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이 황당한 뼈대를 독자로 하여금 과학적으로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믿게 하는 기술은 전적으로 베르베르의 글솜씨구요. 이야기에 한없이 빠져들게 하는 마력도 역시 베르베르의 힘입니다. 

그리고 14만명이 동거하는 우주선에서의 생활방식이 처음에는 '공동생산 공동분배'라는 유토피아적 사회로 시작하지만, 결국 질서유지를 빌미로 행정, 사법, 입법의 통제 위주로 회귀한다는 구조는 인간의 DNA에 새겨진 근원적 파괴본능과 권력에의 의존성을 실감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파피용에서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은 결론입니다. 어딘지 모르는 행성에서 신인류가 살아가는 모습을 성경의 그것과 유사하게 묘사한 것은 베르베르식 세계관이 아닌가 싶더군요. 종교와 과학이 믹스되어 경계가 모호해지는 불확실성의 세계는 그의 소설에서 일관되게 읽혀지는 부분이죠. 솔직히 전 결론 부분을 애매하게 끝내주길 바랬으나, 베르베르는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줌으로써 오히려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버리네요.

천재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베르베르를 보면 이런 문구가 생각납니다. 
상상력의 한계가 그 사람의 한계다.

덧글 1...
참고로 위의 문구는 최경환선수가 두산선수시절 했던 말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흠 정말?)

덧글 2...
파피용에 나오는 퀴즈 하나 풀어보실래요?
저는 읽자마자 바로 눈치를 챘습니다만... (쿨럭)

이것으로 밤이 시작하고
이것으로 아침이 끝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달을 쳐다볼 때 보인다.

여기에서 이것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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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TV를 없앴더니 자연스럽게 음악과 책을 가까이 하게 되더군요. 구조가 본질을 결정한다더니 정말인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집의 주 이용 컨텐츠도 바뀌었습니다.

원래 TV를 잘 보지도 않았지만...
TV에서 CD 플레이어로, 동영상에서 텍스트로...

조용한 지난 주말 밤 집어든 책은 이외수의 '하악하악'이었습니다. 출근을 앞둔 우울한(?) 휴일이었기에 가급적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걸 골랐는데요. 괜챻은 선택이었습니다.

이외수 특유의 문법이 담겨있는 필체도 여전했구요. 톡톡튀는 생각도 살아 있구요. 가볍지만 생각을 하게 하는 이외수식 철학도 새록새록하네요.

책을 읽으면서 디지털 시대 생존법을 터득한 이외수가 새로운 컨텐츠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CF에서 독특한 개성을 보여준 바도 있지만, 이외수라는 캐릭터가 네티즌들을(일명 찌질이들) 훈계할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로 자리잡았죠. 그의 실명 댓글이 성지순례지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런 커뮤니케이션을 즐기는 작가도 없지 싶습니다.


그리고 짧지만 해학이 있는 그의 글이 광고 소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재미있는 발견이었습니다. KTF의 CF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하악하악'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더군요. 저작권료는 받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저작권에도 관심이 많으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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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고른 책이 꽤 괜챦은 내용일 때 마치 잔디밭을 걷다 네잎 클로버를 발견한 듯한 느낌인데요. <굿바이 클래식>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케이스네요. 주위에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한번 읽어들 보시지요.^^


이 책은 클래식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은 비서구권, 특히 한국에서의 서양문물 권력화에 대한 냉철한 비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 뿐만 아니라 폭넓은 이야기를 담고 있죠.

서양 제국주의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두가지의 문화도구를 퍼뜨렸는데요. 하나가 기독교(찬송가)이고 또 하나가 의학이죠.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외부 문물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이 두가지 무기가 각각 음악과 의학분야에서 독보적인 정서권력과 생체권력을 차지하게 되었구요. 더 나아가 국내에서 스스로 그 영향력을 확대재생산하며 하나의 이데올로기로까지 기능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생체권력이라는 용어는 미셸푸코가 서양의학이 식민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로 정의를 내렸다네요.

하지만 정작 서양에서는 두가지 모두 절대권좌에서 물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클래식이라 불리우는 서양고전음악은 링거로 연명하고 있는 상태인데요. 예쁜 음악만을 추구하는 서양고전음악은 현대에 들어와 한계에 부닺쳤다고 저자는 진단합니다. 물론 저자의 개인적인 평가입니다만,누군가 해야 할 말을 콕 집어 한 듯한 느낌이더군요.

이런 서양음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뮤지션들이 혁신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서양악기의 속성상 음악다운 음악을 구현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플륫과 대금을 비교했는데요. 플륫은 기껏 불어봐야 400m 정도 퍼지기도 힘든데, 대금은 10리, 즉 4km를 퍼진다고 하네요. 이렇게 될 수 있는건 대금이 갈대의 속청으로 만든 청공(淸孔)이란게 있어 위력적인 사운드를 내기 때문이구요. 물론 멀리 퍼지는 소리의 힘이 악기를 평가하는 주요인은 아니지만, 이런 속성 때문에 한국음악은 자연에 더 가깝고 자연속에서 훨씬 더 매력적으로 들리게 됩니다.

이 역시 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한국음악이 우월하다고 말하는건 아니겠죠. 하지만 적어도 한국전통음악에 대해서 모르고 있던 부분, 그리고 애써 부정해왔던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국 음악계는 이런 조류에 민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적입니다. 서양고전음악을 음악의 중심으로 놓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대학교육도 서양고전음악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고 그 외의 음악은 부수적인 분야로 취급당하고 있죠. 저자는 이런 현상을 기득권 고수, 고액과외를 위한 카르텔 등으로 풀고 있는데요. 상당히 공감가는 바가 많습니다.

책에서 한가지 재미난 비유를 하네요. 허스키 이야기인데요. 얘기인 즉슨 이렇습니다.

캐나다에 허스키라는 개가 있는데요. 캐나다 사람들은 개의 습성이나 생김새 등을 고려할 때 허스키를 명견으로 자부하고 있답니다. 이걸 본 한국사람이 크게 깨달아 한국의 진돗개는 명견이 아니구나, 똥개구나 하고 스스로 격하시킨거죠. 그래서 그 한국사람은 한국으로 돌아가 허스키를 키우고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허스키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생겼을 무렵 다시 캐나다로 갔는데, 여기서 또 한번 충격을 받습니다. 캐나다 사람들이 허스키를 수많은 개의 한 종으로 취급해 진돗개, 풍산개 등과 동등한 위치로 평가하고 있었거든요. 캐나다 사람들은 개는 개일 뿐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거죠.

이에 한국사람은 개탄합니다. 어떻게 명견 허스키를 저렇게 몰라줄 수 있는가 하면서 오히려 분개합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 타락한 캐나다 사람을 탓하며 더욱 허스키 숭배에 빠지게 되죠. 결국 캐나다에 없는 허스키 숭배사상이 한국에서 오히려 만연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뭔가 뒤통수에 망치로 맞은 듯한 느낌 혹시 안드시나요? 이게 허스키나 음악만의 얘기가 아니라, 종교, 정치, 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심한 작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은 클래식 천동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합니다. 아니 이미 클래식을 중심으로 음악계가 움직인다는 천동설은 서양에서 이미 소멸했는데도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천동설에 머물러 있다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음악을 음악으로 보는 지동설로의 전환을 주장합니다. 그래야 클래식 울렁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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