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읽게 된 <7년의 밤>은 마치 영화를 보 듯 숨가쁘게 읽혀진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가 서술하느냐에 따라 긴장감은 이렇게 달라진다. 

작가의 필력 덕분이다. 


이 책은 어느 날 밤 일어난 사고 혹은 살인이 불러온 나비효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다들 if를 달고 후회하지 않을까 싶다. 이왕 엎어진 물은 담을 수 없는 법.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은 각자의 계산에 따라 행동한다. 생존을 위해 벌이는 두뇌게임 같다. 그러나 두뇌게임을 할 만큼 영리하지 않은 캐릭터도 있다. 아들을 향한 아빠의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 하지만 그 어떤 힘보다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눈길이 가는 인물은 아들 서원이다. 서원은 이름보다 살인자의 아들로 사회에서 기억된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자연스럽게(?) 부당한 주변의 냉대와 대우를 받고 있다. 심리적 연좌제의 적용 대상인 셈이다. 


문명화될 수록 죄에 대한 벌과 범죄자에 대한 처리방식은 응징에서 교화로 바뀌어 간다. 연좌제도 제도적으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규범적 연좌제의 소멸과 달리 심리적 연좌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 악령처럼 남아 있다.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어떤 심리적 신체적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면죄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그들을 안아줄 수 있을 만한 포용력이 없다. 


유사한 책이 있다. 1999년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2명의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가 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이다. 놀랍게도 가해자의 엄마는 사고 당시의 집에서 계속 살고 있다. 이웃이 가해자의 범죄가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인식했고 그녀를 포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수 클리볼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교 역할을 하고 공감의 힘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단다. 미국이 처음부터 이런 케이스를 만든 건 아니다.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책을 보면 저자 잭 이브라힘 역시 <7년의 밤> 서원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주위의 냉대는 물론 폭력에 시달렸고, 20번 넘는 이사를 해야 했다. 개명까지 했다. 90년 11월 메이르 카하네 암살사건의 범인 엘사이드 노사이르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불과 10년의 갭을 두고 미국 사회는 포용의 힘을 키운 것이다. 


<7년의 밤>의 서원을 보며 우리 사회가 언제쯤 편견 없이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올지 궁금했다. 건강한 신체는 무균실이 아닌 세균에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눈길도 안주는 책이 있다면 자기계발 관련 책이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자기 발전의 한계를 사회제도가 아닌 개인 탓으로 돌리고 경쟁사회에서의 승리를 지고지선임을 맹목적으로 주입한다. 이 논리에 빠지면 개인은 체제에 순응하게 되고, 사회는 기득권층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자기계발서와 비교할 순 없지만, 자기성찰 도서 역시 광의의 이데올로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경쟁을 똟어낸 성취만큼 이나 욕심버리기를 통한 안분지족 역시 특정 사고방식을 주입하는데 익숙하다. 힐링이 결국 외부가 아닌 내면세계에 집중하여 온갖 시름에서 벗어나자는 것 아닌가. 둘 간의 차이는 기득권층 이익에 얼마나 봉사하느냐 여부다. 과거 법가, 유가, 도가 등 집권층의 권력유지 이론이 피지배계층의 생활 철학으로 자리잡은 것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를 통합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 책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는 '욕망의 자유'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욕망의 자유, 즉 선택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저자인 아잔 브라흐마라가 불교 승려임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무언지 아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라깡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내 욕망의 실체를 정확히 안다면 그 욕망을 내려놓을 필요도 욕망에 집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다시 말하면 죽기 전에 진정한 자기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인간은 노력하고 발전한다.


저자는 개별 사례들을 나열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은 벽돌에 관한 이야기다. 집을 만들 때 벽돌 2 개를 잘 못 쌓아 매번 무너뜨릴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제자리에 잘 쌓여진 998개의 벽돌에 주목하라고 하니, 그 집이 다시 보이더란다. 


"물론 내 눈에는 잘못 놓인 2 장의 벽돌이 보입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쌓아 올린 998개의 벽돌들도 보입니다." 


이 깨달음에서 많은 것이 떠올랐다. 부분적인 허물에 집착해 전체적인 장점에 소홀했던 어리석음에서 앞으로 잘 못 쌓을지 모를 두려움까지 모두 훌훌 털어버려야 하지 않을까. 


자기성찰서는 내면에 존재하나 평소 깨닫지 못했던 가치를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이다. 사회의 변혁을 이끄는 이데올로기와 동행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앙상블을 이룰 것이다. 간디가 그러했 듯이.


뱀발. 류시화 시인이 번역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던 건 사랑에 대한 정의다. 내게 사랑이란 단어는 타인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기에, 작가가 주장하는 논지에 쉽게 동의되지 않았다. 머릿 속으로는 이해갈 듯 하나, 가슴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가는 사랑의 원초적인 의미인 에로스를 사회적 시각으로 해석한 듯 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두 개인 사이의 가벼운 계약관계가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경험"


에로스에 대한 정의다. 어렵다. 또 하나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세계를 돈으로 규격화시키기에 '동일성의 지옥'이라 표현하고 동시에 사랑의 주체들을 나르시시즘의 함정에 빠뜨린다고 본다. 돈은 새로운 경계를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하기 때문이다." 


결국 타자성이란 게 사랑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데, 자본주의 질서가 타자성을 방해하고 사랑이 꽃필 수 없는 곳으로 만든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돌이켜 보면 신자유주의의 양극화 현상이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대중들이 생업에 쫓겨 각박한 감정의 사회가 되고, 금전적 잣대로 개개인을 평가하는 사회이긴 하다. 그래서 결혼율이나 출산율이 저하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로스가 종말되었다는 주장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과거 지금보다 더 살기 힘들었던 시대에도 분명 사랑은 존재했고, 앞으로도 자본주의가 심화된다 한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종말의 길을 걸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에 대한 정의가 작가와 나 사이 간극이 크다고 봐야 한다. 만약 작가가 규정하는 사랑을 인간관계로 치환한다면, 나로선 읽기 수월해진다. 왜냐하면 사회구조의 빈화방향을 봤을 때 인간관계가 점점 사막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선 구조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해석하는 게 맞는지부터 이견이 달린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을 개인 감정의 영역으로 남겨뒀다. 본능적 감정이 아닌 후천적 학습으로 체득되어지는 사랑은 사회구조적인 영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이 책은 사랑보단 사회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타자성을 증발시킨 나머지 사랑의 행위마저 금전적 가치로 매기는 건 낯설지 않다. 이 책에서 예로 든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드는 궁금증 하나. 왜 굳이 번역의 형식을 띠었을까? 독일어로 초판을 찍었다 해도 저자가 한국어로도 출판할 수 있었을 텐데.. 



여행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야만 하는 책. 


이 책은 여행작가가 무엇이고, 되기 위해선 무얼 준비해야 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선 무얼 버텨내야 하는가 알 려준다. 한 마디로 여행작가를 꿈꾸기는 쉬워도 따라하기는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 실제 여행작가의 지극히 현실적인 얘기라 설득력이 남다르다. 그래서 이 책은 읽기에 따라 여행작가의 꿈을 키울 수도 깨뜨릴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작가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여행작가는 책만으론 밥 먹기 힘들단다. 여행도 자비로 갔다 와야 하기에 ROI를 맞추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뭔가 스폰서가 있을 법하지만, 그런 건 가물에 통나듯 하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공짜밥은 없다는 게 이 바닥 생리다. 여행지건 호텔이건 홍보는 필수고 책에 광고라도 한 장 삽입해야 한다. 그냥 속 편하게 자기 돈을 먼저 때려박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기 돈 들여 써낸 컨텐츠가 활자화된 책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또 얼만가. 책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인세로 통장잔고에 찍히는 건 생각만큼 크지 않단다. 따라서 강연 등의 부업을 해야 하며 그마저 없을 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 노마드의 삶이 초원이 뒤덮인 여름엔 배를 채울 수 있지만, 눈으로 가득한 겨울엔 무조건 버텨내야 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보면, 여행작가란 직업은 매력적이긴 한가 보다.


가슴에 콕 박혔던 글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1. 우선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써봐라. 책 한 권은 폰트 10 크기로 A4 50장 정도다

2. 글을 썼으면 묵혀라. 시간이 지난 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 퇴고를 해라. 

3. 사진을 스토리와 디테일이 살아있게 잘 찍어야 한다. 메시지의 힘은 글보다 사진이 클 수 있다.

4 카메라는 가급적 좋은 걸 써라. 

5. 책을 내기 위해선 완성원고를 쓰고 기획서를 출판사에 보내 협의한다. 

6. 사진을 잘 찍으려면 우선 노출, 초점, 균형을 맞춰라. 피사체 외 잡스러운 것은 치워라. 

7. 블로그, 트위터 등 SNS를 잘 활용하자. 단 블로그는 이미지와 글이 7:3 글이 많아야 5:5가 되는 게 중요하다. 



한 분야에 가(家)를 이룬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치열한 투쟁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오랜 세월을 지켜왔다는 자체가 그에게 보통 사람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바둑에 대한 호감과 함께 삶에 대한 자세를 배울 수 있게 한다. 


조훈현은 바둑을 두 듯 인생을 살고, 바둑의 판세를 읽 듯 인생을 해석한다. 그게 옳던 그르던 그는 그렇게 살았고, 그 선택의 축적분이 지금의 그다. 한 때 온라인 바둑게임 사업을 하면서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그 길이 바둑 저변 확대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온갖 비난에도 떳떳할 수 있었다. 비록 사업은 실패해서 결과적으로 악수를 둔 셈이지만, 인생에선 악수인 걸 알면서도 둬야 한다고 주잔항다. 오히려 그는 나이 어린 친구들이 하기엔 비난이 더 커지고, 나이가 든 사람이 하기엔 부담스러우니 자신이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까지 보였다. 어쨌든 그 진정성은 책에서 충분히 느껴졌다. 


한 가지 공감했던 건 삶의 자세에 대한 조언이다. 매너는 가르칠 수 있지만, 인품은 못 가르친다는 것, 가르치려 덤비는 순간 망가질 수 있기에 그저 모범이 되라는 얘기는 새겨둘 만한 교훈이다. 누구나 알지만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반면 알파고와 같은 AI에 대해서 오판한 면이 있다. 아무리 기보를 외워도 고수는 사고의 깊이가 있기에 한 순간에 승부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디 오판이 조훈현만의 생각이었을까. 그렇게 이세돌의 패배는 전 국민의 충격이었다. 


번외로 바둑을 모르는 나로선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유창혁의 바둑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바둑류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건 인생과 비슷해서 일 것이다. 천재형과 노력형, 공격형과 수비형 등 자신의 스타일을 대입해 응원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조훈현은 그런 면에서 내가 선호했던 기사는 아니었다. 된장국 냄새 나는 서봉수를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책에선 두 사람이 사석에서 피하는 사이라는 게 의외기도 하고, 한편 이해되기도 한다. 그만큼 치열한 승부를 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회사에 두고 짬 날때마다 읽었다. 하루에 몇 십장을 읽을 때도 있었고, 며칠간 한 장 못 넘길 때도 있었다. 단숨에 읽어내진 않아선지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에도 앞의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앞의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책은 결말만으로도 훌륭하다. 내가 이해하는 셸리 케이건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두번째 유사영생의 길, 즉 내 사후에도 존재할 의미있는 성취를 일궈낸 삶이 의미있는 삶이다. 


셸리 케이건은 죽음에 대해 얘기하지만, 사실 이 책은 삶에 대한 책이다. 죽음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배경으로, 혹은 막연한 두려움으로 죽음을 대하고 그에 맞춘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죽음은 삶을 대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케이건은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밝힌다. 자신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방식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점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간접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말하지만, 논리적으로 합당하기에 다른 어떤 주장보다 강력하다. 그래서 이 책은 꼭 죽음에 대한 얘기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논리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다. 공포는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는 달라진다. 이 책은 영혼의 존재를 따지면서 시작한다. 영혼이란 있을까? 인간을 영적 존재로 보는 이원론자는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혹은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반면 일원론자는 영혼은 있을 수 있으나 육체의 부분이라 주장한다. 


케이건은 일원론의 입장에서 이원론을 공격한다. 물리적 관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기 어려우며, 영혼이나 전생이 있다 해도 육체에서 비롯된 기억이 없다면 현재 살아있는 자신과 어떤 연관관계도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사후세계는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육체가 생체기능을 중지하는 순간 영혼은 사라지는 것이며, 정신과 영혼 모두 육체에서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인간을 육체, 인격, 영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인격의 종말을 죽음으로 정의한다면 인격이 사라지고 영혼만 윤회하는 불교, 힌두교, 등의 환생논리 역시 결국 육체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라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결국 나와 연관된 기억, 욕구 등을 포함한 인격이 사라진 채 영혼만이 영생을 한다면 영생한다한들 현재의 나와는 어떤 연결고리도 찾기 어렵다. 


갑자기 영화 <메트릭스>가 떠올랐다. <메트릭스>에서는 타인의 경험을 다운로드해 더 강력한 파워를 장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무술을 고수처럼 하게 되고, 헬기를 조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적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쉽지 않은 얘기다. 다운로드하는 매뉴얼은 누군가의 육체를 기반으로 수련된 결과물이므로 신체조건이 다른 타인에게 맞을리 없다. 물론 이식할 수 있다는 전제 또한 검증된 바 없다. 이런 면에서 정신, 그리고 나아가 영혼 역시 육체와 유기되어 생각하긴 어렵지 않을까?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케이건은 우선 죽음이 나쁜가 질문부터 던진다. 죽음이 나쁜 건 내가 삶에서 누리고 있는 좋은 것들을 잃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생은 좋은 것일까? 삶이 괴로운데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이를 논의하기 위해 케이건은 그릇이론을 들고 나온다. 삶을 그릇이라 가정할 때 나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담아 그 총합이 플러스인가 마이너스인가를 계산해 삶을 평가한다. 지극히 수학적인 방식이지만 이해하기엔 편하다. 플러스인 인생에선 영생이 축복이지만, 마이너스가 지속되는 인생에서 영생은 저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이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여부는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이 지점부터 케이건은 삶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고픈 이야기를 여기에 담았다고 본다. 죽음은 삶에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필연성, 가변성, 예측불가성, 편재성 등 죽음의 특성이 결국 삶을 아름다고 가치있게 만들어준다는 주장이다. 이런 삶과 죽음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삶을 더욱 활기차게 가꾸어 줄 수 있기에 우리는 삶을 좀 더 성찰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의 서두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다. 케이건이 보는 가치있는 삶이란 내 사후에도 존재할 의미있는 성취를 일궈낸 삶이 의미있는 삶이다. 후대에도 계속 언급될 생명력을 지닌 자신의 성취물이 있다면 그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얘기다. 충분히 가슴에 새겨볼 만한 논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비록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성취물 없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 관련한 따뜻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회자된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참고로 케이건은 민감한 문제인 자살도 이야기한다. 죽는 게 더 나은 삶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는 합리성과 도덕성이라는 두가지 관점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케이건은 합리성과 도덕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런 삶이 존재할 수 있으나, 자살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살요인이 그 순간 대단한 것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확률 또한 크기 때문이다. 대단히 용기있는 주장이다. 도덕적으로 자살을 터부시하는 맹목성이야말로 인간의 합리적인 선택 자체를 박탈하는 건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케이건은 종교적 관점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신이 부여한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을 신의 뜻에 대한 거역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신이 부여한 생명을 연장시키는 의료행위 또한 거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성경에 씌여있기 때문에 자살을 죄악시하는 것 또한 신화적인 믿음에 가깝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얘기도 있지만, 지금 그것을 지켜야할 금기로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케이건이 주장하는  것처럼 삶을 단순히 계량화할 수는 없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다르고 추구하는 목적 또한 다르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기까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꼭 후대에 남길 성취물이 있어야만 의미있는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안빈낙도와 가정의 평화를 위한 삶 또한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글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게 지도와 나침반이듯이,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하고 싶다면 죽음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에게 피할 수 없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권할 만 하다.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는 알려진대로 폴 고갱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갱의 작품은 쉽게 접하면서도 그의 삶에 대해선 그리 알려진게 없는데, 이 소설을 읽어보면 고갱이란 작가의 면모를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다. 


프랑스 출신의 고갱은 소설속에서 런던 출신의 증권 중개인 스트릭랜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평범한 삶을 살았던 스트릭랜드가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떠나면서, 소설은 추리소설같은 미궁 속으로 빠진다. 도대체 왜 그가 안빈낙도를 버리고 파리로 떠났는지 주변 사람들은 온갖 억측으로 추리해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맞히지 못한다. 단순하게도 그는 정말 그림을 위해 파리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47세의 나이로 말이다.  


빈 손으로 떠난 스트릭랜드는 파리에서 생활고를 겪는다.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작가로서의 꿈을 차근히 준비한 그는 작품활동에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주변을 고려하지 않는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이 기피하는 인물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몇 사람만큼은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헌신적인 도움을 준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더크 스트로브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단 화가인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빨리 캐치했다. 그에게 스트릭랜드의 예술작품은 분명 존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트로브의 예술적 빈곤함을 알아 챈 스트릭랜드는 그를 철저히 홀대했고, 그럼에도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를 숭상했다. 그런 나머지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 아내인 블란치마저 빼앗기고 블란치도 스트릭랜드의 버림을 받아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이쯤에서 책이 시작할 무렵 글을 다시 되새겨 보자. 책에는 지위가 아닌 인간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스트릭랜드라고 규정했다. 아마도 서머셋 몸은 스트릭랜드의 예술을 향한 불같은 집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열정을 형상화한 것이 달(Moon)이었을 테고, 그에 반해 세속적인 가치가 6펜스짜리 은화였을 것이다. 결국 타히티 섬에까지 가서 자신의 예술적 노력을 바쳐 불멸의 작품을 남긴 스트릭랜드의 불꽃같은 예술정신은 인류 역사에 길이 길이 남았다. 


하지만 그의 집념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의 발현에 불과하다. 그 끝이 비록 가치있는 결론을 낳았다 할지라도, 그는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배신했으며, 철저히 주변 사람을 이용했다. 의도했건 아니건 결과적으론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셈이다. 다른 게 있다면 그는 정말 순수한 예술정신을 지녔고, 또 그만큼 자신을 학대했을 뿐이다. 나쁜 남자와 비견된다. 그에 비하면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는 참으로 인간미 넘치는 나쁜 남자였다. 그는 적어도 남을 위해 눈물 흘렸던 마음을 지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나쁜 남자둘에게는 여자를 끄는 마력이 있는 듯 하다. 파리에서도 타히티 섬에서도 스트릭랜드는 여자들의 관심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난 주변에서 스트릭랜드와 유사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예술적 소양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그런 주변 파괴적인 인격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불처럼 화려하지만 모든 걸 집어 삼키는 사람 보다 흘러가는 물처럼 주변과 융화하는 사람이 더 좋지 않을까? 조르바도 부담스럽지만 스트릭랜드는 사절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니다. 오가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내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번역의 한계 때문인진 몰라도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채긴 쉽지 않다. 


우선 뫼르소라는 난해한 인물이 등장한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보여주는 행태나 재판에서의 자기 변호 방식 등으로 보아 뫼르소는 보통 사람은 아니다. 여기에서 '보통이 아니다'라는 단어는 비범하다기 보다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마치 20세기초 프랑스에서 살았음직한 일베충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을 보면 일베충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는 일베충이 아니다. 그는 이방인이자, 부조리 인간일 뿐이다. 


우선 뫼르소는 제목 그대로 이방인이다. 뫼르소는 어머니 장례식에서 슬퍼하기 보다 자신의 욕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태양이 뜨겁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질렀고, 이런 행위에 대해 관습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아니 그로서는 자신의 행위를 합리적으로 설명했으나, 아무도 그 의견을 이해해주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겠다. 심지어 그는 죽음을 앞둔 시점 사제와의 만남에서도 신과 화해하지 않았다. 어쩌면 뫼르소로선 존재하지 않는 신과 화해할 것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관습과 괴리된 그를 품어줄 제도는 없었고, 그는 제도의 틀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말았다. 오직 그가 바라는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대에 오르는 것 뿐. 아마도 그 사형대만이 관습과 뫼르소가 유일하게 합의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자기행위의 총합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적용하면, 관습과 융화될 수 없는 사고의 누적분이 바로 뫼르소인 셈이다. 어떤 글에는 작가인 카뮈마저 이방인의 삶을 살았다던데, 그렇다면 카뮈는 이방인을 그린 게 아니라, 자신을 그린 셈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카뮈는 뫼르소를 이방인으로도 부조리의 인간(L'homme absurde)이라고도 정의했다. 여기서 부조리의 의미는 부조리한 상태를 늘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뜻한다. 합리성을 지향하는 인간이 불합리한 외부세계와 끊임 없이 부딪치는 감정, 그 황당함이 뫼르소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다. 뫼르소는 장례식에서 행해지는 여러 관습적 절차가 합리적이지 않았을 뿐이고, 아랍인을 살해한 이유가 뜨거운 햇살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태도는 불합리한 외부세계의 눈에 소시오패스처럼 비쳤을 뿐이다. 완전히 도덕적이지도 완전히 부도덕적이지도 않은 '부조리'를 의식하는 부조리 인간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법률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건 살인혐의로 기소된 뫼르소에게 가해지는 검사의 심문이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의 행태가 아랍인을 살해한 혐의와 아무 관련 없는데도, 심문은 줄곧 뫼르소의 행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마치 어머니 장례식에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할 정도라면(A), 아랍인을 고의로 살해했을 것이다(B) 라는 취지다. 하지만 A와 B는 뫼르소의 인식을 판단하는 추론일 뿐, 사건의 연속성과는 어떤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뫼르소의 변호인은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재판관들도 뫼르소를 단죄하고 말았다.


참고로 상단은 어떤 출판사 표지에 등장한 사진이다. 처음엔 배우나 모델인줄 알고 사진에서 뫼르소의 반항기를 느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알베르 카뮈의 실제 모습임을 알고선, 역시 뫼르소는 카뮈의 분신이었구나 싶었다. 고뇌가 담긴 눈빛과 깊게 패인 주름살, 영락 없는 이방인의 모습이다.  



노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면서도 그 폭이 넓다. 논어는 정확하게 왕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공경을 정의하지만 도덕경은 그렇지 않다. A=a가 아니라, A≠B, A≠C 즉, A가 아닌 다른 것들을 나열하여 A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도덕경에 등장하는 도라는 개념이 언어로 규정되는 순간 도가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게 도덕경의 매력이자 마력인 듯 하다. 


12. 

五色令人目盲(오색령인목맹) : 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 

五音令人耳聾(오음령인이롱) : 다섯 가지 음으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 

五味令人口爽(오미령인구상) : 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진다 

馳騁畋獵令人心發狂(치빙전렵령인심발광) : 말달리기 사냥하기로 사람의 마음이 광분하고 

難得之貨令人行妨(난득지화령인행방) : 얻기 어려운 재물로 사람의 행동이 그르게 된다 

是以聖人爲腹(시이성인위복) : 성인은 배를 위하고 

不爲目(불위목) : 눈을 위하지 않는다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 그러므로 후자는 뒤로하고 전자를 취한다

 

13. 

寵辱若驚(총욕약경) : 수모를 신기한 것처럼 좋아하고 

貴大患若身(귀대환약신) : 고난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기십시오 

何謂寵辱若驚(하위총욕약경) : 수모를 신기한 것처럼 좋아한다 함은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寵爲下(총위하) : 낮아짐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得之若驚(득지약경) : 수모를 당해도 신기한 것 

失之若驚(실지약경) :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신기한 것 

是謂寵辱若驚(시위총욕약경) : 이것을 일러 수모를 신기한 것처럼 좋아한다고 한다 

何謂貴大患若身(하위귀대환약신) : 고난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긴다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吾所以有大患者(오소이유대환자) : 고난을 당하는 까닭은 

爲吾有身(위오유신) :내 몸이 있기 때문 

及吾無身(급오무신) : 내 몸이 없어진다면 

吾有何患(오유하환) : 무슨 고난이 있겠는가 

故貴以身爲天下(고귀이신위천하) : 내 몸 바쳐 세상을 귀히 여기는 사람 

若可寄天下(약가기천하) : 가히 세상을 맡을 수 있고 

愛以身爲天下(애이신위천하) : 내 몸 바쳐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若可託天下(약가탁천하) : 가히 세상을 떠맡을 수 있을 것이다

 

14. 

視之不見(시지불견) :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名曰夷(명왈이) : 이름하여 <이>라 하여 보자 

聽之不聞(청지불문) :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名曰希(명왈희) : 이름하여 <희>라 하여 보자 

搏之不得(박지불득) :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名曰微(명왈미) : 이름하여 <미>라 하여 보자 

此三者(차삼자) : 이 세 가지로도 

不可致詰(불가치힐) : 밝혀 낼 수 없는 것 

故混而爲一(고혼이위일) : 그래서 세 가지가 하나로 혼연 일체를 이룬 상태 

其上不皦(기상불교) : 그 위라서 더 밝은 것도 아니고 

其下不昧(기하불매) : 그 아래라서 더 어두운 것도 아니다 

繩繩不可名(승승불가명) : 끝없이 이어지니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다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 : 결국, <없음>의 세계로 돌아간다 

是謂無狀之狀(시위무상지상) : 이를 일러 <모양 없는 모양>이고 

無物之象(무물지상) : <아무것도 없음의 형상>이라 한다 

是謂惚恍(시위홀황) : 이것을 <황홀>이라 하겠다 

迎之不見其首(영지불견기수) : 앞에서 맞아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隨之不見其後(수지불견기후) : 뒤에서 좇아도 그 뒤를 볼 수 없다 

執古之道(집고지도) : 태고의 도를 가지고 

以御今之有(이어금지유) : 오늘의 일을 처리하라 

能知古始(능지고시) : 태고의 시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是謂道紀(시위도기) : 이를 일컬어 <도의 실마리>라 한다

 

15. 

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 :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微妙玄通(미묘현통) : 미묘현통하여 

深不可識(심불가식) :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夫唯不可識(부유불가식) :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니 

故强爲之容(고강위지용) :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억지로 형용을 하라 한다면 

豫焉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고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 사방의 이웃을 대하듯 주춤거리고 

儼兮其若容(엄혜기약용) : 손님처러 어려워하고 

渙兮若氷之將釋(환혜약빙지장석) : 녹으려는 얼름처럼 맺힘이 없고 

敦兮其若樸(돈혜기약박) :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曠兮其若谷(광혜기약곡) : 계곡처럼 트이고 

混兮其若濁(혼혜기약탁) : 흙탕물처럼 탁하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 누가 탁한 것을 고요히 하여 점점 맑아지게 할 수 있을까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 누가 능히 가만히 있던 것을 움직여 점점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 

保此道者(보차도자) : 도를 체득한 사람은 

不欲盈(불욕영) :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夫唯不盈(부유불영) :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새로워진다

 

16. 

致虛極(치허극) : 완전한 비움에 이르게 하고 

守靜篤(수정독) : 참된 고요함을 지키라 

萬物竝作(만물병작) :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吾以觀復(오이관복) :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 본다 

夫物芸芸(부물운운) : 온갖 것 무성하게 뻗어 가나 

各復歸其根(각복귀기근) : 결국 모두 그 뿌리로 돌아가게 된다 

歸根曰靜(귀근왈정) : 그 뿌리로 돌아감은 고요함을 찾음이다 

是謂復命(시위복명) : 이를 일러 제 명을 찾아감이라 한다 

復命曰常(복명왈상) : 제 명을 찾아감이 영원한 것이다 

知常曰明(지상왈명) : 영원한 것을 아는 것이 밝아짐이다 

不知常(불지상) : 영원한 것을 알지 못하면 

妄作凶(망작흉) : 미망으로 재난을 당한다 

知常容(지상용) : 영원한 것을 알면 너그러워진다 

容乃公(용내공) : 너그러워지면 공평해진다 

公乃王(공내왕) : 공평해지면 왕같이 된다 

王乃天(왕내천) : 왕같이 되면 하늘같이 된다 

天乃道(천내도) : 하늘같이 되면 도같이 된다 

道乃久(도내구) : 도같이 되면 영원히 사는 것이다 

沒身不殆(몰신불태) : 몸이 다하는 날까지 두려울 것이 없다


17. 

太上不知有之(태상부지유지) :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其次親而譽之(기차친이예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其次畏之(기차외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其次侮之(기차모지) :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信不足焉(신불족언) : 지도자에게 신의가 모자라면 

有不信焉(유불신언) : 사람들의 불신이 따르게 된다 

悠兮其貴言(유혜기귀언) : 훌륭한 지도자는 말을 삼가고 아낀다 

功成事遂(공성사수) : 지도자가 할 일을 다하여 모든 일 잘 이루어지면 

百姓皆謂我自然(백성개위아자연) :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다>고


이쯤 읽으면 도덕경은 통치철학으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특히나 16장과 17장은 하나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 없다. 춘추전국시대 중국 패권을 노리는 왕들과 제자백가들에게는 왕의 자격론이 중요했을 테고 노자의 도덕경은 그들의 논리적 무기가 충분히 되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16장에 왕(王)이 명문화되었음에도 신분으로서의 왕이 아닌 서열로서의 왕으로 해석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런 것이 또 도덕경의 매력이니까.


모임에서 들은 얘기가 있다. 

"지배계층의 주관이 피지배계층의 객관이다."

"현자는 없다. 다만 현자를 알아보는 현자만 있을 뿐."


정말 도덕경에서도 찾을 수 없는 명언이 아닌가 싶다. 특히 현자는 없다는 말은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깊이 새겨야 할 말이 아닐까. 



도덕경을 음미하면서 느끼는 건 노자는 틀이 없다는 점이다. 후대 사람들이 여러 해석으로 틀을 만들지만, 그건 노자를 보는 게 아니라 노자를 통해 자신을 보는 것일 뿐이다. 노자가 실존인물이건 아니건, 그의 사상은 정치 철학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도 그 시대 왕과 제자백가들의 정치적 논박에 사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6. 

谷神不死(곡신불사) : 계곡의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是謂玄牝(시위현빈) : 그것은 신비의 여인 

玄牝之門(현빈지문) : 여인의 문은 

是謂天地根(시위천지근) : 하늘과 땅의 근원 

綿綿若存(면면약존) : 끊어길 뜻하면서도 이어지고 

用之不勤(용지불근) : 써도 써도 다할 줄을 모른다

 

7. 

天長地久(천장지구) : 하늘과 땅은 영원하니 

天地所以能長且久者(천지소이능장차구자) :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以其不自生(이기불자생) :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故能長生(고능장생) : 그러기에 참된 삶을 사는 것이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 :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한다 

非以其無私邪(비이기무사사) : 사사로운 나로 하지 않기에 

故能成其私(고능성기사) : 진정으로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는가

 

8. 

上善若水(상선약수) :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 

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리만물이불쟁) :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악) : 모두가 싫어한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이다 

故幾於道(고기어도) :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居善地(거선지) :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지혜 

心善淵(심선연) : 심연을 닮은 마음 

與善仁(여선인) : 사람됨을 갖춘 사귐 

言善信(언선신) : 믿음직한 말 

正善治(정선치) : 정의로운 다스림 

事善能(사선능) : 힘을 다한 섬김 

動善時(동선시) : 때를 가린 움직임 

夫唯不爭(부유불쟁) : 겨루는 일이 없으니 

故無尤(고무우) : 나무람을 받을 일도 없다

 

9. 

持而盈之(지이영지) :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보다 

不如其已(불여기이) :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좋다 

揣而銳之(췌이예지) :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不可長保(불가장보) : 쉽게 무디어집니다 

金玉滿堂(금옥만당) :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莫之能守(막지능수) : 이를 지킬 수가 없다 

富貴而驕(부귀이교) : 재산과 명예로 교만해짐은 

自遺其咎(자유기구) : 재앙을 자초한다 

功遂身退(공수신퇴) : 일이 이루어졌으면 물러나는 것 

天之道(천지도) : 하늘의 길이다

 

10. 

載營魄抱一(재영백포일) : 혼백을 하나로 감싸안고 

能無離乎(능무리호) :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專氣致柔(전기치유) : 기에 전심하여 더없이 부드러워지므로 

能瓔兒乎(능영아호) : 갓난아이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滌除玄覽(척제현람) :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 

能無疵乎(능무자호) : 티가 없게 할 수 있겠는가 

愛民治國(애민치국) :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能無知乎(능무지호) : “무위”를 실천할 수 있겠는가 

天門開闔(천문개합) : 하늘 문을 열고 닫음에 

能無雌乎(능무자호) : 여인과 같을 수 있겠는가 

明白四達(명백사달) : 밝은 깨닭음 사방으로 비춰 나가 

能無爲乎(능무위호) : 무지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겠는가 

生之畜之(생지축지) : 낳고 기르시오 

生而不有(생이불유) :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마시오 

爲而不恃(위이불시) :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고 하지 마시오 

長而不宰(장이불재) :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시오 

是謂玄德(시위현덕) :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한다

 

11. 

三十輻共一(삼십폭공일) : 설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當其無(당기무) :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有車之用(유차지용) :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埏埴以爲器(연식이위기) :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當其無(당기무) :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有器之用(유기지용) :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鑿戶牖以爲室(착호유이위실) :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當其無(당기무) :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有室之用(유실지용) :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故有之以爲利(고유지이위리) :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無之以爲用(무지이위용) :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6장을 해석하는데 참으로 다양한 시각이 있다. 에로티시즘에서 페미니즘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에로티시즘도 페미니즘도 노자가 의도한 바로 볼 순 없다. 그건 현세 사람들의 의도가 개입된 해석일 뿐이다. 2,500년 전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예를 들면 지금으로부터 수 백년이 흐른 서기 2500년에 이성을 반대하는 반이성주의가 생겨났으며, 반이성주의가 21세기의 스티브 잡스를 반이성주의의 태두라고 주장한다 가정해보자. 그 근거는 스티브 잡스가 얘기한 "Stay foolish, stay hungry"다. 어딘지 어색하지 않은가?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를 근거로 반이성주의로 해석하는 건 자유지만, 그렇다고 스티브 잡스가 얘기한 진의를 왜곡해선 안된다. 스티브 잡스는 그저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장에서 젊은이들에게 항상 낮은 자세로 연구하고 도전하라는 연설을 했을 뿐이다. 그가 수 백년 후에나 등장할 반이성주의의 흐름을 예견했을리 만무하다. 그래서 인문학 해석은 시대배경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도덕경 1장에서 9장까지는 도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고, 10장은 그런 도를 너가 과연 실천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고 있다. 당시의 시대를 대입하면 화자는 노자, 청자는 왕이나 제자백가, 즉 글을 읽을 수 있는 정치집단이었을 것이다. 결국 후대의 다양한 해석과는 상관없이 도덕경은 정치철학일 확률이 높다. 노자가 공자를 가르쳤다는 얘기도 도덕경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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