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유럽 배낭여행할 때의 일입니다. 스위스를 갔었는데요. 그 날은 루체른 시내구경하면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카펠교도 보고 호수에서 배도 타고 간만에 여유있는 일정을 보냈죠.

아래 이미지에 각도가 꺽인 다리가 루체른의 유명한 카펠교인데요. 다리라기 보다는 전시장에 가깝더군요.다리 안에는 여러 그림이 걸려있어서 한적하게 감상하면서 걸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운치있는 다리가 있었으면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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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카펠교 근처에 'Korea town'이라는 한국식당이 눈에 띄더군요. 한동안 한국음식을 못먹어서 무쟈게 땡겼는데 잘되었다 싶어 들어갔습니다. 스위스의 물가는 유럽에서도 비싼 편이고, 그중에서도 한국음식은 희소성 때문인지 엄청 비쌌었죠. 하지만 역시 한국사람은 고추장을 먹어야 힘을 내는지라 눈물을 머금고 주문했죠.

음식은 너무 깔끔하고 맛있었습니다. 얼큰한 육계장과 반찬을 싹 비웠죠. 물도 주셨는데 간만에 공짜로 물을 먹으니 이게 물인지 꿀인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이 때만 해도 앞으로 닥칠 일을 예상하진 못했었습니다.

식사 다 마치고, 주인 아주머니와 가벼운 인사까지 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루체른 시내구경하고 유레일을 타러 역으로 갔죠. 그날 오후에 스페인인가로 넘어가려고 했었거든요. 근데 사건은 여기서 터지고 맙니다.
 
열차에 자리잡고 앉았는데, 아뿔사 여권을 아무리 찾아도 없네요. 분명히 여권을 뒷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ㅠ.ㅠ 뒷주머니에 넣은게 잘못이긴 했습니다. 게다가 여권안에는 유레일패스가 들어있었구요. 바로 앞에서 역무원이 표검사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하늘이 샛노랗게 변하더군요. 갑자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 고민이 되더라구요. 일단 열차를 타고 나서 찬찬히 가방을 뒤질까, 아니면 기차는 보내고 루체른을 다시 뒤질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차가 움직이려 해서 일단 부리나케 내렸습니다. 아무래도 뒷주머니에 있던 여권이 가방안에서 발견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거든요.

열차를 보낸 후, 플랫폼에서 샅샅이 뒤졌습니다. 역시 없더군요. 이젠 생존의 문제가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여권을 재발급 받아야 하는데 발급받는 동안 거의 여행은 포기해야 되구요. 유레일패스는 유럽에서는 팔지 않으니 정가대로 사고 여행하려면 여행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죠. 여권과 유레일패스를 잃어버리면 사실상 여행은 망치게 됩니다.

돌아다녔던 루체른 시내를 다시 돌았습니다. 길거리에 혹시 있나 그 큰 배낭을 메고 열심히 뒤졌죠. 당연히 없었구요. 그렇게 중요한 여권을 뒷주머니에 허술하게 보관했던 제 자신이 한없이 미워지더군요.

그러다 혹시나 해서 한식당 'Korea town'에 가봤습니다. 근데 주인 아주머니께서 저를 기다리고 계시더군요. 화장실에 떨어져 있는걸 보관하고 있다면서... 순간 어찌나 고맙던지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했습니다. 근데 그 아주머니는 혹시 제가 집에 전화했을까봐 한국에 있는 저희 집에 전화를 하셨다더군요. 아드님이 여권 잃어버렸다고 하면 식당으로 오라고...

그냥 보관만 해도 되는데 그렇게까지 친절을 베푸시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그리고는 집에 전화하라고 하시더군요. 아버님이 한밤중에 전화 받으셔서 아마 놀라셨을꺼라고... 물론 식당에 있는 전화를 그냥 쓰라고 하시구요. 이런게 동포애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는 전화에서 칠칠치 못하다는 꾸중을 들었지만 아주머니께 꼭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구요. 너무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수십번 하고 나서야 식당을 나왔습니다. 그 이후로는 허리가방에 항상 여권을 보관하고 다녀 무사히 배낭여행을 마쳤습니다.

언젠가 스위스에 가면 꼭 찾아가보리라 생각하는데 기회는 쉽게 오질 않네요. 10년 전의 일이라 아직 그 식당이 있을지도 모르구요. 하지만 주인 아주머니의 친절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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