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는 특이하게 영화보다 먼저 OST가 귀에 익었던 영화입니다. 자동차 사기 전에 자동차 엔진소리에 빠진 격이라고 할 까요. OST의 애절함이 거꾸로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키웠던 케이스죠. 물론 소문으로 영화가 좋다는 얘기는 숱하게 들었지만요. 그런 화양연화를 개봉한지 8년이 지나서야 보게 되었네요. 역시 영화는 강추더군요. OST도 애잔하구요.

화양연화는 약간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불륜영화가 금지된 사랑을 하는 두 남녀가 주인공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런 배우자를 둔 사람들의 이야기거든요. 그것도 자신의 아내와 상대방의 남편이 부적절한 관계이기에, 서로를 위로하면서 정이 들고, 사랑에 빠지는 그런 내용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배우자의 불륜을 증오하면서 자신들도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있다는데 대한 정신적 갈등이 역으로 그들을 옥죄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인데요. 가령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육체적 관계는 맺지 않는 방식으로 부도덕한 배우자들과는 다르다고 위안을 삼죠. 결국 그들은 남들의 시선 때문에 감칠 맛나는 하지만 진솔하지 못한 사랑을 합니다.


특히 이웃의 일에 지나치리만치 간섭하는 홍콩이라는 특수한 분위기는 더욱 그들의 사랑을 음지로 내몹니다. 남자 주인공인 차우(왕조위)가 싱가포르로 탈출하면서 윤리적 족쇄에서의 일탈을 이루지만, 여전히 그들은 윤리적 틀을 넘지는 못합니다. 역시 문제가 되는건 관습에 물든 그들의 생각이지 지리적 위치는 아니었던거죠. 수리쩐(장만옥)은 싱가포르까지 가면서도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서기도 하구요. 차우도 홍콩의 옛 거처지로 수리쩐을 찾으러 오기도 하죠. 하지만 끝내 두사람은 만나지 못합니다.  

차우가 선택한 최후의 방법은 지극히 도덕적인 방식입니다. 캄보디아의 사원에 자신이 숨겨온 진실을 털어놓는 건데요. 종교적이기까지 하네요. 수백년의 비밀을 간직해온 사원에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는 설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라고 대밭에 소리치는 행위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났던 어떤 옛날 이야기를 연상시키네요. 마찬가지로 차우도 이제는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행하지 않았을까요?

영화는 시간적 순서를 다르게 배치함으로써 생소함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원인-결과가 아닌 결과-원인의 순으로 보여줘서 관객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는 기법을 쓰더군요. 왕가위 감독의 영상문법인 듯 보이는데 괜챻네요. 굳이 모든걸 정해진 순서대로 보여줄 필요는 없는거죠. 그러고보니 왕가위 감독은 영화 도입부에 결과를 미리 말해놨네요. 남자의 소심함에 여자는 떠났다 라고...

영화 '화양연화' 덕분에 주말 밤이 풍성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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