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중심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는 싫어하는 편이다. 여기에 타 문화에 대한 증오가 깔려있는 영화는 더더욱 그러하다. 지금껏 보아왔던 람보, 수퍼맨 등의 부류를 싫어했던 이유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기분이 텁텁하다. 


이 영화에선 두가지 화두가 머릿 속에 맴돌았다. 


과연 영웅이란 무엇인가?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킨 미국 그리고 압도적인 미군전력의 엄호를 받는 스나이퍼의 활약상이 영웅으로 칭송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물론 그는 미국 보수진영 내에서 전설로 통한다. 그렇다고 시대와 지역을 떠나 보편적인 영웅이 되는 건 아니다. 어느 지역에선 그는 텍사스 출신의 가장 많은 전쟁 실적을 올린 씰의 스나이퍼일 뿐이고, 어떤 곳에선 저항군을 가장 많이 살해한 원흉으로 여겨질 것이다. 확실한 건 911테러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진지한 의문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승자건 패자건 전쟁 후유증은 심각하다는 사실이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STD)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수준 이상의 고통을 준다는 게 이 영화에서도 드러난다. 주인공 카일의 동생이 중얼거리는 대사도 그렇고, 귀향한 카일이 문득문득 분노조절을 하지 못하는 모습도 그렇고, 카일을 살해한 참전군인의 이상행동도 그렇다. 어찌보면 참전군인 역시 전쟁의 피해자다.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행복에 우선순위는 고연 무엇일까 고민하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국제시장이 떠올랐다. 국제시장을 본적은 없지만 주위 얘기를 종합할 때, 국제시장과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보수진영의 식욕을 자극할만한 조미료가 가득 뿌려진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 영화를 필요 이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 이 감독의 시선은 이렇구나 하고 보면 된다. 아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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