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전은 잠실야구장에서 직접 응원하고 왔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이 거의 만 하루가 지난 시간인데도, 목젖 부근이 아직도 칼칼하네요. 어찌나 함성을 질러댔는지 야구장에서 나올 무렵엔 극도의 피로감까지 몰려오더라구요. 이겼으면 모르겠는데 져서 그런가요. 허탈감까지 겹쳐 졸음까지 밀려오더군요. 이렇게 진이 빠지게 응원한건 프로야구 출범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네요.

경기는 말 그대로 14회까지의 연장혈투 끝에 후련하게 패했습니다. 여기서 '후련하다'는 뜻은 잘했다기 보다, 정말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없다'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되지 싶네요. 2차전 경기평은 직관 응원후기가 되겠네요. 우울한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1. 명불허전(名不虛傳) 랜들의 위기관리능력
단기전에서 선발투수의 의미는 처음 나오는 투수에 불과합니다. 양팀 감독이 승부에 물러섬이 없다는 점에서 봤을 때 교체 타이밍은 늘 한박자 앞섰죠. 랜들은 시즌 막판에 그닥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어떨지 걱정을 갖게 했는데요. 2차전 내용에서는 일단 합격점을 줄만 하네요. 4이닝 1실점입니다.

가장 큰 위기는 4회였는데요. 안타없이 포볼 4개를 헌납하는 졸투를 했지만 다행히도 1점만으로 막아냈죠. 랜들의 위기관리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차전과 다른 점은 김경문감독이 랜들을 빨리 내리기 보다는 한번 지켜보는 느낌을 주더군요. 1차전 승리의 여유가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요. 하여간 랜들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1점만으로 막고 마운드를 김상현에게 넘겨줬습니다.

2. 이제 여유마저 느껴지는 오재원
선취점은 오재원의 원맨쇼로 만들었습니다. 전상렬과 이종욱의 연속안타로 만든 무사 2, 3루에서 오재원은 통쾌한 3루타를 뽑아내죠. 더불어 그의 전매특허인 레프트 스트레이트 세리머니도 보여줬습니다. 항상 똑같은 세리머니인거 보면 따로 연습하는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동작이지 싶네요. 참고로 두산의 홍성흔은 라이트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구요. 이종욱은 박수치는 세리머니가 전매특허죠. 이대수는 작은 키지만 폴짝 뛰어 때리는 배구선수 스파이크 세리머니구요. 두목곰 김동주는 두손을 번쩍드는 만세 세리머니입니다. 고영민은 상대의 하복부를 라이트로 짧게 끊어치는 스타일인데요. 최홍만이 와서 좀 배웠으면 하는 타법이기도 하죠.


뭐 누구나 더 멋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지작렬상으로 홍성흔 다음으로 오재원을 꼽고 싶습니다. 선수들 사기도 높이고 관중들 엔돌핀도 콸콸 솟게 하는 오재원의 레프트 스트레이트 세리머니는 그의 긴 팔과 다리에 참 잘 어울리네요. 덕분에 팬들도 부쩍 늘었습니다.  

계속된 찬스에서 고영민의 짧은 땅볼 때 3루에 있던 오재원은 득달같이 홈을 파고들어 3점째를 추가했죠. 홈에 쇄도하는 모습은 심장에 칼을 꽂으러 달려가는 무사를 연상시키더이다. 반면 박진만은 어제의 본헤드 플레이 여파인지 홈에 던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1루로 던졌구요.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오늘도 여유있게 이기겠구나 싶었습니다. 초반에 3점의 리드를 하고 있었는데 연장까지 갈 줄은 누가 알았나요. 그리고 마지막에 질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3. 홍콩 할매귀신도 놀라는 전상렬의 완소 수비력
가을의 사나이, 아니 가을을 기다리는 할매 전상렬은 나이가 36세입니다. 올 시즌에는 그닥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도 못했습니다. 두산에서 외야수 주전따기는 사막에서 바늘찾기 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죠. 리그 극강의 김현수, 이종욱 붙박이에 유재웅, 이성렬, 전상렬, 민병헌의 무한경쟁입니다. 이런 쟁쟁한 후배들과의 경쟁속에서도 늘 밀알같은 존재감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전상렬은 두산의 든든한 자산이네요.

2차전에서도 두어번 정도 키를 넘어가는 타구를 폴짝 뛰어 잡아내는 미기를 선보였습니다. 홍콩할매도 하기 힘든 뒤돌아 점프 캐치를 무리없이 해내는 할매 전상렬의 파인 플레이에 관중들은 전상렬을 연호했구요. 선수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경기 내내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타구는 편안하게 지켜봤네요.

생각해보면 그 흔한 개인 응원가 하나 없는 전상렬이지만, 팬들에게 괴성과 함께 싸인을 요청받는 스타도 아니지만, 두산의 고참으로서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그가 참 고맙습니다.

4. 더블스토퍼의 진면목, 임태훈과 이재우
동점인 상황에서 올라와 임태훈과 이재우는 각각 3이닝씩을 무실점으로 잘 막아줬습니다. 이재우는 경험이 많아 큰 걱정은 안했지만, 임태훈은 아직은 어린 나이이기에 은근히 조마조마했었는데요. 다행히 과감한 정면승부로 삼성의 강타선을 무력화시켰죠. 특히 초반에는 직구에 비해 슬라이더가 스트라이크 존에서 확연히 먼 곳으로 떨어져 두들겨 맞는거 아닐까 했는데, 잘 극복해냈습니다. 이제 아기곰에서 점점 불곰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줬구요.


이재우는 다양한 구질의 공을 꽤 정확하게 제구해서 무리없이 3이닝을 막았습니다. 현재 두산 투수중에서 터프세이브 상황에서 김경문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투수는 이재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과감성도 있구요. 제구력도 되구요. 경험도 있죠. 두산 불펜의 힘은 임태훈, 이재우의 더블 스토퍼가 있어 오승환이 부럽지 않습니다.

5. 부러져버린 날개 이용찬
김경문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명제를 임태훈보다 먼저 올린게 잘못이었다고 했는데요. 제가 볼 땐 이용찬을 가장 늦게 투입한게 더 큰 실수가 아니었나 싶네요. 14회 주자 1, 2루 상황에서 소방수의 임무를 맡긴건 이용찬에겐 너무 심한 압박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용찬 뒤로는 더 나올 투수도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물론 이승학도 있긴 하지만 3차전 선발은 아껴둔다는 의미에서 보면 이용찬은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헉 지금 뉴스에서 보니 3차전은 이혜천이네요. 그럼 2차전에서도 결장한 이승학은 뭥미??)

초구가 볼로 잡히자 만루를 의식해 이용찬은 가운데 공을 던졌고, 상대적으로 노련한 신명철은 실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14회 연장에서 신명철의 싹쓸이 3루타는 거의 사망선고였고, 김경문감독은 그냥 그에게 이닝을 맡겼습니다.

제가 전에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오재원과 함께 이용찬을 주목해야 한다고 포스팅했었는데요. 제가 바라던 시나리오는 이용찬의 선발등판이었습니다. 어차피 선발은 단기전에서 첫번째 나오는 투수라는 점에서 부담이 덜하고, 의외의 카드가 오히려 파괴력이 클 수 있기에 그렇게 희망했더랬죠. 김경문감독과 제 생각이 달랐고 어쨌든 결과는 이용찬의 깜짝 활약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용찬은 분명히 발전된 모습으로 다시 마운드에 서리라 믿습니다. 그의 포스를 믿기도 하지만, 이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고개숙인 이용찬을 기다리며 격려해주는 선배선수들이 있기에 그 날은 반드시 올껍니다. (용찬아 힘내라! 승부에 연연하기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으니 그냥 야구를 즐기렴. 뒤는 선배들에게  맡기고~ 그리고 날개 부러진건 빨간약 바르면 바로 낫는다... ^^)

뽀너스 #1. 오늘의 MVP
오늘의 MVP, 아니 어제의 MVP를 뽑자니 좀 거시기 하네요. 이미 신명철은 뽑혀있으니 뭐 제가 뽑은들 큰 의미는 없겠죠. 하지만 두산선수로는 이재우와 임태훈으로 선정하고 싶네요. 무려 6이닝을 두 선수가 막아냈다는 점, 위력투로 투구로 승부의 추를 팽팽하게 땡긴 점, 향후 활약을 예고한다는 점 등을 평가하고 싶습니다.

덧글 1...
선동렬감독의 2차전 승리소감을 보니 배수의 진을 치고 경기에 임했다고 하네요. 2패를 안고 대구에 갔더라면 다시 잠실땅을 밟긴 힘들었을테니 당연한 각오였겠죠. 인터뷰 사진을 보면 승리의 기쁨에 배시시 웃고 있군요. 하지만 진정한 2차전의 승자는 선동렬감독이 아닌 김성근감독일꺼 같은 느낌은 왜일까요?

덧글 2...
두산 응원단의 응원모습을 동영상으로 올려봅니다. 관중석 가장 꼭대기에서 찍어서 그라운드는 좀 멀지만, 관중들의 열기는 느끼실 수 있을겁니다.
 


덧글 3...
우연한 기회에 베어스 동호회 카페에서 2차전 표를 구했는데요. 표를 얻기 위해 이수역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먼 길이 수고스럽지 않았던건 표를 양도해주신 친절한 두산팬 덕분이었네요. 양도 받은 후에도 잘 보시라고 문자 넣어주신 이름 모를 4077님 감사합니다.


오늘 SK와의 경기는 정말 최악이네요. 아무래도 작년 한국시리즈에서 역전패한 이후 징크스에 걸린 것 같습니다. 무려 5:0으로 이기고 있다가 8, 9회에 5점을 내줘서 연장에 들어갔네요. 후덜덜... 올해 유난히 두산의 중간과 마무리가 이유없이 약합니다. 어휴..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솔직히 김재호가 2루 슬라이딩으로 나주환의 무릎을 강타할 때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김성근감독의 항의는 그렇다치고 들어오면서 김광수코치와 언쟁을 벌이는건 참 짜증스럽더군요. 그 일로 김경문감독까지 나왔구요. 두 감독이 직접 부딪치진 않았지만 감독끼리 싸우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뻔 했죠. 올시즌이 끝나기 전에 양김씨의 육박전 한번 볼 수도 있겠군요. 헐헐헐~

그리고 SK는 보복으로 유재웅에게 빈볼을 던집니다. 투수 김준은 퇴장당했구요. 다행히 유재웅이 선수단을 자제시켜 벤치 클리어링까지 가진 않았지만, 두 팀 역시 라이벌답습니다. 완전히 원수끼리 싸우는 기분이네요. 저도 인터넷으로 보면서 무지 흥분되었구요.
 
근데 9회초에 정재훈이 3점을 주고 연장에 끌려간건 수치스럽습니다. 마무리가 믿음직스럽지 못한건 두산으로서 재앙이죠. 임태훈이나 이재우로 돌리는 것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나마 위안꺼리는 이재우의 재기 가능성과 김재환의 스타성을 직접 확인했다는 겁니다. 이재우는 150km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졌고, 변화구도 낙차가 꽤 크더군요. 위기 관리능력까지 전성기 시절을 회복한것 같네요. 그리고 김재환은 포수면서 우투좌타라는 강점이 있고, 잘생긴데다 파워까지 겸비해서 앞으로 제2의 홍성흔이 확실해 보입니다. 보기만 해도 흐믓하네요. 김재환이 포수왕국의 명성을 이어가길 바랍니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두산이 전상렬의 끝내기 결승타로 6:5로 이겼네요. 다행입니다. 어쨌든 SK전은 이제 전쟁이네요.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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