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년만에 대학로 연극을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본게 2003년인가의 '날 보러와요' 였던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확실치는 않네요. 하여간 공연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연극을 그동안 관람하지 못했던건 생업에 쫓기는 생활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은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본다는건 거짓말이거든요. 그간의 무심함에 반성하며 대학로를 찾았는데요. 연극을 보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우모가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냄새' 때문입니다. 소규모 연극인 경우 고작 20~30명을 앞에 두고 공연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바로 1m 앞에서 실감나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배역이 아닌 배우의 열정에 더 감동받게 되더군요. 열악한 현실에서도 열정 하나로 연기에 몰두하는 모습은, 남대문시장에서 받는 삶에 대한 강한 체취와 유사합니다. 이에 반해 뮤지컬은 좀 다르죠. 뮤지컬도 배우의 열정이 숨쉬긴 하지만, 관객과의 거리감이 어느 정도 확보된 상태에서 연기하기에 감동의 농도는 연극에 못미칩니다. 그래서 우모는 왠지 배우와 하나되는 느낌의 연극을 좋아합니다.

연극 '마리화나 2008'은 대학로 어느 외진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더군요. 찾기 쉽지 않았습니다. 위로는 고시원이 있는 허름한 건물 지하에 극장이 있더라구요. 너무 썰렁해서 '설마 이런데 극장이 있나?' 싶었습니다. 매표소도 단촐하구요. 따로 관객들이 대기하는 곳이 마땅치 않아 극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먼저 도착한 관객들끼리 그냥 옹기종기 서있었죠. 마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모여있는 펭귄들처럼... 게다가 난로마저 고장나서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안내요원이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하는데 기분나쁘기 보다는 '그래 이게 바로 연극이야' 하며 흐뭇해했죠. 만약 예술의 전당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면 당장 항의했을텐데, 그놈의 '사람냄새'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너무나도 너그러운 소비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복도 한켠에 놓인 중국음식 빈 그릇까지도 이뻐보이더군요.


연극 '마리화나 2008'은 대학로에서 꽤 인기있는 작품입니다. 오달수와 서주희의 출연도 그렇지만,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한 충실한 대본 덕분인데요. 기대에 어긋남 없는 유쾌한 2시간이었네요. '마리화나 2008'을 분석하면 역사적 사실, 즉 팩트에 덧붙여진 픽션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문종이 세자였던 시절, 문종의 두번째 부인 봉빈이 소쌍, 단지라는 나인과 삼각관계이자 동성애 관계였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퇴위당한 사건이구요. 픽션은 세자, 봉빈, 소쌍, 단지, 석가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용보, 부귀라는 허구인물을 내세워 관계를 더욱 복잡하고, 음란하면서도, 재밌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연극은 리뷰하기도 벅찰만큼 난삽하게 꼬여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삼각관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7명은 모두 연관되어 있죠. 칠각관계라고 해도 될만큼 서로를 속이며, 아니 은밀하게 본능을 해소해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실타래처럼 얽힌 관계를 풀지 못하자, 마지막에 세자가 '떼로 하면 어떨까?' 하는 화두를 던지며 끝을 맺습니다. 유교의 본고장 조선시대의 궁궐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결론인 셈이죠. 

연극은 인간에게는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이 있다는걸 보여줍니다. 본능이 억제되어 있는 가장 극적인 공간으로 궁궐을 내세웠구요. 본능이 거세되어버린 환관과 나인들을 그 상징인물로 등장시켰습니다. 하지만 연극의 전반적인 해학이 외설스러움을 보다듬어서 부담스럽지는 않네요. 오달수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왜 그가 대배우인가를 말해주고요. 차순배의 여장연기도 볼 만 했습니다. 양보람과 채국희, 조승연의 감초연기도 괜챦았네요. 기대했던 서주희는 발성이 약간 약하지 않나 싶었는데, 와이프는 괜챦았다고 하네요. 관점의 차이인가 봅니다. 그리고 김영철의 대사에서 NG가 나왔는데 덕분에 더 크게 웃었네요. 주변 배우들의 애드립으로 무난하게 넘어갔는데 역시 배우는 센스가 필수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대학로로 나왔는데 엄청 춥더군요. 늦은 시간이었지만 떡볶기까지 먹고 왔습니다. 깻잎 떡볶기라고 나름 유명한 집이더군요. 맛은 뭐 늘 그렇듯 뭐든 다 맛있습니다.^^ 정말 간만에 연극을 보니 다시 예전 대학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더군요. 소원했던 와이프와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구요. 무엇보다 잃어버렸던 감수성을 찾았다는 점이 행복하게 하네요. 조만간 다른 연극도 시간을 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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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타유발자들'은 평가 스펙트럼이 비교적 넓은 영화입니다. 평론가들의 평은 무척 좋았구요. 일반인들의 평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죠. 좀 보기 불편했다는 반응이 많았던걸로 기억됩니다. 근데 직접 보니 그런 평가가 나올만한 영화가 아닌가 싶네요. 충분이 이해를 할 수 있을꺼 같아요.

'구타유발자들'은 영화적 장치를 사용해 공포를 조성하지 않습니다. 무대도 벌건 대낮에 개방된 야외공간입니다. 깜짝 놀라게 하는 음향적 효과도 없죠. 근데 영화는 상당히 긴장감있게 진행됩니다. 그건 바로 영화가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인 등장인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굴러가기에 관객들은 편히 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적절한 핸드핼드 카메라 사용으로 관객이 사건의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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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이 원신연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을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죠. 참고로 원신연감독은 '세븐데이즈'도 만들었습니다. 역시 좋은 영화 만드는 감독은 다르죠?

그리고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력이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한석규, 이문식, 오달수는 이름값만으로도 웰메이드 영화임을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죠. 실제로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서로 출연하겠다고 자청했다는 후문도 있더군요. 영화를 볼줄 아는 안목과 훌륭한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연기력이 명배우의 조건이라면 이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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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함축하는 메시지입니다. 영화 후반부 한석규의 중량감있는 등장으로 이 비정상적인 인물들의 관계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비이성적이면서도 극단적인 복수극을 가능하게 한 과거의 사건을 마지막에 가서야 보여준건 극적 긴장감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어진 충격적인 한석규의 죽음...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감독 나름의 해결안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석규 스스로 원초적인 복수의 씨앗을 스스로 제거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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