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던 건 사랑에 대한 정의다. 내게 사랑이란 단어는 타인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기에, 작가가 주장하는 논지에 쉽게 동의되지 않았다. 머릿 속으로는 이해갈 듯 하나, 가슴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가는 사랑의 원초적인 의미인 에로스를 사회적 시각으로 해석한 듯 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두 개인 사이의 가벼운 계약관계가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경험"


에로스에 대한 정의다. 어렵다. 또 하나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세계를 돈으로 규격화시키기에 '동일성의 지옥'이라 표현하고 동시에 사랑의 주체들을 나르시시즘의 함정에 빠뜨린다고 본다. 돈은 새로운 경계를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하기 때문이다." 


결국 타자성이란 게 사랑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데, 자본주의 질서가 타자성을 방해하고 사랑이 꽃필 수 없는 곳으로 만든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돌이켜 보면 신자유주의의 양극화 현상이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대중들이 생업에 쫓겨 각박한 감정의 사회가 되고, 금전적 잣대로 개개인을 평가하는 사회이긴 하다. 그래서 결혼율이나 출산율이 저하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로스가 종말되었다는 주장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과거 지금보다 더 살기 힘들었던 시대에도 분명 사랑은 존재했고, 앞으로도 자본주의가 심화된다 한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종말의 길을 걸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에 대한 정의가 작가와 나 사이 간극이 크다고 봐야 한다. 만약 작가가 규정하는 사랑을 인간관계로 치환한다면, 나로선 읽기 수월해진다. 왜냐하면 사회구조의 빈화방향을 봤을 때 인간관계가 점점 사막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선 구조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해석하는 게 맞는지부터 이견이 달린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을 개인 감정의 영역으로 남겨뒀다. 본능적 감정이 아닌 후천적 학습으로 체득되어지는 사랑은 사회구조적인 영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이 책은 사랑보단 사회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타자성을 증발시킨 나머지 사랑의 행위마저 금전적 가치로 매기는 건 낯설지 않다. 이 책에서 예로 든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드는 궁금증 하나. 왜 굳이 번역의 형식을 띠었을까? 독일어로 초판을 찍었다 해도 저자가 한국어로도 출판할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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