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눈길도 안주는 책이 있다면 자기계발 관련 책이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자기 발전의 한계를 사회제도가 아닌 개인 탓으로 돌리고 경쟁사회에서의 승리를 지고지선임을 맹목적으로 주입한다. 이 논리에 빠지면 개인은 체제에 순응하게 되고, 사회는 기득권층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자기계발서와 비교할 순 없지만, 자기성찰 도서 역시 광의의 이데올로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경쟁을 똟어낸 성취만큼 이나 욕심버리기를 통한 안분지족 역시 특정 사고방식을 주입하는데 익숙하다. 힐링이 결국 외부가 아닌 내면세계에 집중하여 온갖 시름에서 벗어나자는 것 아닌가. 둘 간의 차이는 기득권층 이익에 얼마나 봉사하느냐 여부다. 과거 법가, 유가, 도가 등 집권층의 권력유지 이론이 피지배계층의 생활 철학으로 자리잡은 것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를 통합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 책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는 '욕망의 자유'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욕망의 자유, 즉 선택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저자인 아잔 브라흐마라가 불교 승려임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무언지 아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라깡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내 욕망의 실체를 정확히 안다면 그 욕망을 내려놓을 필요도 욕망에 집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다시 말하면 죽기 전에 진정한 자기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인간은 노력하고 발전한다.


저자는 개별 사례들을 나열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은 벽돌에 관한 이야기다. 집을 만들 때 벽돌 2 개를 잘 못 쌓아 매번 무너뜨릴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제자리에 잘 쌓여진 998개의 벽돌에 주목하라고 하니, 그 집이 다시 보이더란다. 


"물론 내 눈에는 잘못 놓인 2 장의 벽돌이 보입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쌓아 올린 998개의 벽돌들도 보입니다." 


이 깨달음에서 많은 것이 떠올랐다. 부분적인 허물에 집착해 전체적인 장점에 소홀했던 어리석음에서 앞으로 잘 못 쌓을지 모를 두려움까지 모두 훌훌 털어버려야 하지 않을까. 


자기성찰서는 내면에 존재하나 평소 깨닫지 못했던 가치를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이다. 사회의 변혁을 이끄는 이데올로기와 동행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앙상블을 이룰 것이다. 간디가 그러했 듯이.


뱀발. 류시화 시인이 번역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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