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회사에 두고 짬 날때마다 읽었다. 하루에 몇 십장을 읽을 때도 있었고, 며칠간 한 장 못 넘길 때도 있었다. 단숨에 읽어내진 않아선지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에도 앞의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앞의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책은 결말만으로도 훌륭하다. 내가 이해하는 셸리 케이건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두번째 유사영생의 길, 즉 내 사후에도 존재할 의미있는 성취를 일궈낸 삶이 의미있는 삶이다. 


셸리 케이건은 죽음에 대해 얘기하지만, 사실 이 책은 삶에 대한 책이다. 죽음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배경으로, 혹은 막연한 두려움으로 죽음을 대하고 그에 맞춘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죽음은 삶을 대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케이건은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밝힌다. 자신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방식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점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간접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말하지만, 논리적으로 합당하기에 다른 어떤 주장보다 강력하다. 그래서 이 책은 꼭 죽음에 대한 얘기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논리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다. 공포는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는 달라진다. 이 책은 영혼의 존재를 따지면서 시작한다. 영혼이란 있을까? 인간을 영적 존재로 보는 이원론자는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혹은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반면 일원론자는 영혼은 있을 수 있으나 육체의 부분이라 주장한다. 


케이건은 일원론의 입장에서 이원론을 공격한다. 물리적 관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기 어려우며, 영혼이나 전생이 있다 해도 육체에서 비롯된 기억이 없다면 현재 살아있는 자신과 어떤 연관관계도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사후세계는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육체가 생체기능을 중지하는 순간 영혼은 사라지는 것이며, 정신과 영혼 모두 육체에서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인간을 육체, 인격, 영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인격의 종말을 죽음으로 정의한다면 인격이 사라지고 영혼만 윤회하는 불교, 힌두교, 등의 환생논리 역시 결국 육체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라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결국 나와 연관된 기억, 욕구 등을 포함한 인격이 사라진 채 영혼만이 영생을 한다면 영생한다한들 현재의 나와는 어떤 연결고리도 찾기 어렵다. 


갑자기 영화 <메트릭스>가 떠올랐다. <메트릭스>에서는 타인의 경험을 다운로드해 더 강력한 파워를 장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무술을 고수처럼 하게 되고, 헬기를 조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적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쉽지 않은 얘기다. 다운로드하는 매뉴얼은 누군가의 육체를 기반으로 수련된 결과물이므로 신체조건이 다른 타인에게 맞을리 없다. 물론 이식할 수 있다는 전제 또한 검증된 바 없다. 이런 면에서 정신, 그리고 나아가 영혼 역시 육체와 유기되어 생각하긴 어렵지 않을까?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케이건은 우선 죽음이 나쁜가 질문부터 던진다. 죽음이 나쁜 건 내가 삶에서 누리고 있는 좋은 것들을 잃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생은 좋은 것일까? 삶이 괴로운데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이를 논의하기 위해 케이건은 그릇이론을 들고 나온다. 삶을 그릇이라 가정할 때 나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담아 그 총합이 플러스인가 마이너스인가를 계산해 삶을 평가한다. 지극히 수학적인 방식이지만 이해하기엔 편하다. 플러스인 인생에선 영생이 축복이지만, 마이너스가 지속되는 인생에서 영생은 저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이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여부는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이 지점부터 케이건은 삶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고픈 이야기를 여기에 담았다고 본다. 죽음은 삶에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필연성, 가변성, 예측불가성, 편재성 등 죽음의 특성이 결국 삶을 아름다고 가치있게 만들어준다는 주장이다. 이런 삶과 죽음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삶을 더욱 활기차게 가꾸어 줄 수 있기에 우리는 삶을 좀 더 성찰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의 서두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다. 케이건이 보는 가치있는 삶이란 내 사후에도 존재할 의미있는 성취를 일궈낸 삶이 의미있는 삶이다. 후대에도 계속 언급될 생명력을 지닌 자신의 성취물이 있다면 그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얘기다. 충분히 가슴에 새겨볼 만한 논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비록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성취물 없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 관련한 따뜻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회자된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참고로 케이건은 민감한 문제인 자살도 이야기한다. 죽는 게 더 나은 삶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는 합리성과 도덕성이라는 두가지 관점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케이건은 합리성과 도덕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런 삶이 존재할 수 있으나, 자살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살요인이 그 순간 대단한 것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확률 또한 크기 때문이다. 대단히 용기있는 주장이다. 도덕적으로 자살을 터부시하는 맹목성이야말로 인간의 합리적인 선택 자체를 박탈하는 건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케이건은 종교적 관점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신이 부여한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을 신의 뜻에 대한 거역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신이 부여한 생명을 연장시키는 의료행위 또한 거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성경에 씌여있기 때문에 자살을 죄악시하는 것 또한 신화적인 믿음에 가깝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얘기도 있지만, 지금 그것을 지켜야할 금기로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케이건이 주장하는  것처럼 삶을 단순히 계량화할 수는 없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다르고 추구하는 목적 또한 다르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기까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꼭 후대에 남길 성취물이 있어야만 의미있는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안빈낙도와 가정의 평화를 위한 삶 또한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글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게 지도와 나침반이듯이,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하고 싶다면 죽음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에게 피할 수 없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권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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