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년 전 지구상에는 최소 여섯 가지 인간 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존재하는 종은 하나뿐이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


이 책에는 빅 히스토리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각이 담겨있다. 인지혁명에서 농업혁명, 과학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각각 인간이 똑똑해지고, 자연을 길들이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신의 영역에 진입한 것으로 해석했다.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 등과 함께 동시대에 경쟁 혹은 공존하며 살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박물관에선 유인원에서 직립 인간까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진화론으로 오해하게금 전시를 해왔다. 학교에서도 비슷하게 배웠더랬다. 앞으론 좀 더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흥미로웠던 건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과 동시대에 치열하게 다투면서도 성관계를 하기도 했다는 점. 그 결과로 인종에 따라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의 DNA 비율이 다르다는 것은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식민지 시대 인종 개량론이나 청소론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사피엔스가 진격한 대륙마다 거대동물과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등이 멸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사피엔스는 생태계의 블랙홀같은 존재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연쇄살인마일 테고.


반면 이 책은 빅 히스토리에 집중하다 보니 미시적인 관점에 소홀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식민지 수탈을 기반으로 제국의 번영했다는 사실을 하나의 팩트일 뿐 교훈의 대상으로 삼진 않는다. 오히려 제국주의를 역사 발전과정의 불가피한 측면으로 해석한다. 그런 관점은 하나의 시각으로서 존중할 순 있지만, 식민지를 경험했던 민족의 일원으로서 불편하다.


결과적으로 농업혁명이 사피엔스를 정착하게 했지만, 삶의 질은 수렵시대의 그것에 비해 나아지지 않았다고 하라리는 봤다. 사피엔스의 신체구조가 농사를 하기엔 부적합하며, 특정 작물을 경작하는 사피엔스의 경우 흉작일 때 굶을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설명이다. 이는 과학혁명 이후에도 적용되어, 종의 번성과는 별개로 인간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개인의 영역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런 류의 결론은 허무하다 못해 슬프다. 언제까지 행복은 현실에 만족해야 얻어지는 개인의 몫이어야 할까. 


또한 수렵시대와 농업혁명 이후의 사피엔스의 행복치를 비교하는 게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건 아닌지도 의문스럽다. 어쨌든 사피엔스는 외부 세계의 위협을 끊임없이 제거해왔고 개인 역량과 상관없이 종의 힘에 기대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특정 개인의 케이스로 시대를 정의하는 건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토론거리를 제공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에 빠졌던 종교시대의 사피엔스가 무지를 인정한 순간 과학혁명을 열 수 있었다. 제국의 이익을 위해 과학은 밀착되었고, 그 혁명이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그 결과 인류는 동일한 역사권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신이 되려는 사피엔스의 종말을 예감한다. 알파고로 대변되는 AI의 활돔범위가 확장을 거듭하다 결국 인류의 의식을 대신하지 않을까 하는 그 불길한 예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류 멸방 시나리오로 4 가지를 꼽았다. 핵전쟁, 지구 온난화, 바이러스, 로봇이 그것. 이중 3개는 인류가 만들어낸 창조물이고 1개는 영향을 끼친 자연현상이다. 결국 사피엔스는 하늘을 날다 떨어지는 이카루스의 전철을 밟는 건 아닐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