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설국열차'를 본 후 떠오른건 인생무상이었다. 계급갈등을 뚫고 일궈낸 통쾌한 승리를 기대했던 나로선 당황스러운 결말이다. 하지만 이 당황스러움은 실망이 아닌 신선한 충격에 가까웠다. 봉준호 다운 반전이랄까? 역시 거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덕분에 엔딩 크레딧이 오른 후에도 한참 동안 영화 메시지를 곱씹을 수 밖에 없었다.


영화는 빙하기에 처한 세상에서 노아의 방주 같이 달리는 기차를 배경으로 한다. 그 안에는 열차 칸마다 구분된 계급이 설정되어 있다. 노예와 비슷한 꼬리칸의 승객들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한칸 한칸 앞으로 전진한다. 이쯤 되면 영화의 결말은 대략 견적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상투적인 권선징악을 거부한다. 인간의 선과 악 혹은 사회의 안정과 혁명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진다. 악으로 여겨졌던 윌포드의 사회를 향한 고민이나, 선으로 여겨졌던 커티스의 과거 모두 충격적이다. 이 시점에서 관객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윌포드라면, 내가 커티스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쉽지 않다.


이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연기를 보여준 틸다 스윈튼


이 영화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과 상당히 비슷하다. 소재가 기차와 우주선으로 갈릴 뿐, 영화적 상상력이나 메시지는 도플갱어다. 질서가 잡혀있는 안정된 세계와 그 틀을 깨기 위한 노력이 부딪쳐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 혹은 새로운 창조물은 정반합(正反合)의 원리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에서 정(正)을 윌포드와 길리엄으로, 반(反)을 커티스로 본다면, 합(合)은 요나다. 특이한건 정(正)에 해당하는 윌포드와 길리엄이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상극이면서 동시에 한몸이었다는 점이다. 이건 막바지에 영화를 미궁에 빠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반면 합(合)인 요나는 정(正)과 반(反)의 요소를 모두 갖춘 새로운 결합체다. 기차에서 태어난 까닭에 지구를 경험하지 못한 요나는 기차의 질서에 익숙한 정(正)이며, 어쨌든 반란세력에 합세한 역할은 반(反)에 해당한다. 그러나 요나는 기차를 벗어나 새로운 지구에 발을 내딛어 합(合)으로 승격되는 운명을 맞는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요나가 합(合)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 어차피 역사에서 우연과 필연은 종이 한장 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 아쉬운건 각 등장인물의 복잡한 과거들이 상당 부분 대사로 풀어진다는 점이다. 영상으로 노출되는 소품이나 상징 등으로 암시를 해줬더라면 관객들을 더 큰 충격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을텐데.. 하긴 그런건 '괴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강에 괴물의 등장 이유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밝혔더랬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의 스타일이기도 하고. 


한번쯤 사회와 인간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은 사람에겐 강추, 적당히 잔인한 봉준호 스타일의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에겐 비추. 



개인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감독은 봉준호, 박찬욱, 원신연 등이다. 그중에서도 봉준호는 늘 첫 손에 꼽는다. 그는 좋은 감독 이전에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다. 영화 '괴물'은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만졌다면 어쩌면 유치할 수도 있는 시나리오를 뛰어난 영화적 완성도로 이끌어내는거 보면 분명 특별한 감독이다. 그런 그가 '설국열차'라는 새로운 영화로 충격파를 준비하고 있다. 시나리오 작업만 해도 몇년 걸렸다는 봉준호 감독 인터뷰로 볼 때 기대를 안할 수 없다. 



아직 개봉 전이지만 이미 원작 만화와 몇몇 인터뷰를 통해 대강의 스토리는 노출되어 있다. 얼어붙은 지구, 1년에 지구를 한바퀴 도는 기차, 그 안에 칸마다 구분되어 있는 계급, 그리고 계급 간 투쟁. 봉준호를 좋아하는건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다. 웰메이드 영화에 그치는게 아니라 비수처럼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괴물'에 담겨있는 미국에 대한 시각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설국열차'는 계급이라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이게 어떤 결말로 끝날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상당히 허무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든다. 열차의 앞칸을 향해 돌파하지만 결국 그 끝엔 아무 것도 없을 수도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신'과 같은 결말을 연상케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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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기대는 곧 개봉과 함께 풀린다. 영화 개봉 전에 리뷰 카테고리에 글을 쓰기는 처음이지 싶다. 영화를 본 후엔 또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흥분된다. 



회사에서 담당 회식을 어떻게 할지 우리 수석부서에서 정하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그동안 삼겹살에 소주 일색이었던 회식에 모두 지쳐 있었지만, 사실 회식이란게 그 자체로 달갑지 않아서 영 마뜩챦았다. 차라리 일찍 퇴근시키는게 재충전에 더 좋은데 말이다. 그래도 아이디어는 내야겠기에 영화보며 맥주 마시기를 제안했는데 그냥 그대로 통과되고 말았다. 안하는게 더 좋은데... ㅜ.ㅜ

어쨌든 '괴물' 개봉하는 날에 맞춰 회사동료들과 일찍 퇴근했다. 대부분은 화제작 '괴물'을 보지만 그래도 일부는 '한반도' 등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긴 영화까지 회사사람들이랑 같이 봐야 하느냐는 생각에 일부러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난 강우석감독은 별로였고 봉준호감독을 신뢰하고 있었으니 선택은 당연히 '괴물'이었다.

선택은 탁월~ 그 자체였다. '살인의 추억' 보다 짜임새는 덜 했지만, 메시지나 흡인력은 훨씬 나았다. 봉감독은 나를 배신한 법이 없다. 별을 주라고 하면 주저없이 ★★★★★ 쏜다.





배우들의 연기도 물샐틈없이 이어져 well-made 영화라 평을 받은 이유를 알만 했다. 특히나 변희봉씨의 연기는 묵은 장맛의 우수성을 재확인 시켜줬다. 소시민의 이미지, 못난 아들을 감싸는 아버지, 그리고 가족을 위해 모든걸 희생하는 가장의 모습을 얼굴의 주름 하나하나가 연기하는 듯 매끄러웠다.


마지막 '괴물'에 공격당하기 직전 변희봉씨의 미소는 전율감마저 느끼게 해주는 명장면이었다.(살짝 눈물이 핑 돌았다) 변희봉씨는 '살인의 추억'에서 그리 비중있는 역할은 아니었음에도 맛깔스러운 연기가 눈에 선했는데, '괴물'에서는 한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연기력에 걸맞는 비중을 찾았다.


역시나 영화 끝나고 맥주집으로 옮긴 이후 회식 분위기는 좋았다. 다들 회사 얘기는 빼고 영화 얘기로 꽃을 피웠다. 영화는 이 맛에 혼자보면 제 값을 못뽑는 것 같다. 영화라는 텍스트보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 각자의 해석을 듣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영화보든 동안 발견못했던 텍스트의 의미를 동료를 통해 알게 되었을 땐 음.. 이사람 이런 면도 있었네~ 하는 신선한 발견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보고 맥주 한잔 걸치면 시간이 어느덧 택시잡아야 할 시간이 다가와 과음않고 귀가하게 되니 일석이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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