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견해는 많다. 

종교적 혹은 물질론에 입각해 해석하기도 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받아들이기도 증명하기도 어려운 죽음을 티벳불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매우 궁금했다. 


티벳불교의 죽음은 우선 혼과 신체가 분리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종교의 특성이다. 생명의 시작은 빛이고 빛이 꺼지면서 죽음이 시작된다고 본다. 이 경계에 혼불이 있으며 혼불이 신처에서 빠져나가면서 사후세계는 펼쳐진다. 이 때 근본 빛을 깨닫거나 포와(의식 전의)에 성공하면 빛과 화합한 사자의 의식이 중유(바르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장 정수리를 통과하면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며, 이것이 니르바나(대자유)라고 <티벳 사자의 서>는 말한다. 


죽음의 순간에 해탈하지 못하고 카르마에 따라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면서도 본성을 찾지 못한 영혼은 환생의 길로 접어든다고 본다. 결국 티벳 불교는 환생을 하지 않는 것이 죽음을 임하는 자가 지녀야 할 목표이며, 이를 잊지 않도록 죽음의 순간에서 사후 49일(바르도) 동안 끊임 없이 사자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티벳 사자의 서>인 셈이다. 윤회는 곧 무량한 고통이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빙의란 카르마에 휘둘려 구천을 떠돌던 바르도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 것으로 해석한다. 그럴 듯 하다. 


사후세계인 바르도 동안 여러 경험을 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부터 3~4일간인 치카이 바르도에는 무의식 상태에 머무르고, 초에니 바르도에 이르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고, 이 시기에 다양한 신을 만나게 된다. 17일이 지난 후 맞이하는 시드파 바르도에서는 34일까지 잠깐 평온과 기쁨을 찾게 되며, 해탈과 윤회 사이에 최종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티벳불교가 이해하는 죽음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영혼과 신체가 분리된다는 전제부터 그렇다. 설사 분리된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객체일 뿐이라 생각한다.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얘기할 수는 있으나 증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기에 죽음에 관한 다양한 담론은 끊임 없는 관심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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