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지인의 소개로 보게 된 '라이프 오브 파이'.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는 이 영화를 어드벤처로 분류했다. 외견상 그럴 수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정확히는 휴먼 드라마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물론 휴먼 드라마라는 분류는 없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과 또 자연을 극복해내는 인간의 강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에 어드벤처라는 분류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는 해석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예술 아닌가. 



우선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키워드는 두가지다. 바로 사건과 기억. 사건은 객관적인 현실이지만, 기억은 사건을 주관적으로 내면화한 또 다른 현실이다. 눈 앞에서 벌어진 현실과 그걸 머릿 속에 저장한 기억은 매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일수록 일치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엄청난 충격에 대한 방어기제가 스스로 발동되는 탓에 기억이 조작되기 때문이다. 이 조작이 대중에게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 종교적인 영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파이를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종교관을 갖고 있는 인물로 묘사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렇지 않고서 수 백 일을 태평양에서 버텨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파이는 자신의 경험담을 아름답게 포장한 '기억'에 의존하여 풀어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갈 무렵 기억을 배제한 사건도 들려준다. 뜻밖의 반전에 관객은 충격을 받지만, 파이는 관객에게 묻는다. "Which story do you prefer?" 인생에 정답은 없다. 사건과 기억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주인공 이름 파이다. 원래 이름인 피싱이 발음상 불결한 탓에 갖게 된 별명 파이는 원의 지름에 대한 원 둘레의 비율, 즉 원주율을 뜻한다. 피싱이 학교에서 무한대 숫자인 원주율의 수 백 자리를 외워 얻게 되지만, 파이는 무한히 반복되는 인생사를 뜻한다. 파이를 수로 표현할 때 3.14라고 하지만, 3.14는 말 그대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정의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이다. 유복했던 가정환경에서 자란 파이가 동물원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이민 가게 된 것도, 도중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된 것도, 천신만고 끝에 멕시코 해안에 다다르게 된 것도 모두 끝을 알 수 없는 인생 파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원작자 얀 마텔은 수학에 강한 인도인의 특성도 물론 감안했을 것이다. 


또한 바다에서 같이 표류하는 인간과 호랑이를 현실감있게 그려낸 감독의 능력 또한 충분히 감탄해줘야 한다. 비현실적인 무술동작을 현실감있게 담아낸 와호장룡의 이안 감독이라면 역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철학적인 원작과 탄탄한 시나리오, 그리고 이를 아름답게 그려낸 영상미가 두 시간 넘는 영화를 십 분처럼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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