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대학로에서 연극 한편을 봤습니다. '우리사이'라는 작품인데요. 인간군상들의 다양한 관계를 주제로 삼은 연극이더라구요. 그 관계는 아는 사이, 그 때와 지금 사이, 모르는 사이, 모자지간, 남자와 여자사이, 부자지간, 여기와 거기사이 등 돌아보면 언젠가는 경험했음직한 상황들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어찌보면 스토리로 뽑아내기도 뭐한 그런 이야기조차 섬세한 터치로 잡아내더군요. 개인적으로 영화 감독이 되면 이런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이 연극이 그런 구조와 유사하더군요.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프로그램에는 키네파노라마라는 용어를 쓰면서 설명하던데, 이런게 키네파노라마가 아닌가 싶네요. 참고로 프로그램에 적혀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키네파노라마(Kinepanorama)
키네파노라마는 대형화면방식으로서 다중 카메라와 분리 스크린을 이용해서 360도 원통형 스크린 효과를 내는 것을 말한다. 연극 '우리사이'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8개의 장면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며 맺게되는 다양한 '사이'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연극은 몇가지 특징을 보여주네요.

우선 대개의 경우 연극은 기승전결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작품은 일상생활의 단면을 뚝 잘라 가감없이 보여주기에 클라이막스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밭에서 무뿌리를 뽑아 칼로 뚝뚝 8개로 잘라 먹는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각각의 스토리가 연계구조를 갖는 형태를 취하고 있어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연극에 가공적인 사운드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음향효과는 물론 배경음악까지 모두 배우들이 연출을 하더라구요. 각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배우들이 오카리나, 기타, 트라이앵글, 아코디언 등 악기를 들고 나와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 친근한 느낌을 더하네요. 마치 학예회같은 분위기이기도 하고, 언플러그드 공연같은 필도 나고... 하여간 립싱크 음악을 보다 라이브 음악을 볼 때의 신선함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네요. 대사로만 이어지는, 때론 대사없이 표정과 상황연출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데 배우들은 모두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줬습니다. 와이프 얘기로는 맥베스에서 열연했던 실력파들이 많이 참여했다고 하던데, 과연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더라구요. 더불어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출도 연극을 더욱 풍성하게 해줬습니다.

영화, 오페라, 뮤지컬 등 다양한 공연이 많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연극을 볼 때 가장 행복합니다. 배우의 사람냄새를 가까이에서 맡을 수 있어 좋기도 하구요. 좁은 소극장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삶의 에너지를 받기도 하거든요. 덕분에 봄내음 가득한 주말을 기분좋게 보냈습니다.

덧글...
연극을 같이 본 엄니는 그닥 재미있어하진 않더군요. 와이프와 저는 꽤 재밌게 봤는데... 역시 세대차이란 기호의 차이에서 가장 리얼하게 드러나는 것 같네요.



백만년만에 대학로 연극을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본게 2003년인가의 '날 보러와요' 였던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확실치는 않네요. 하여간 공연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연극을 그동안 관람하지 못했던건 생업에 쫓기는 생활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은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본다는건 거짓말이거든요. 그간의 무심함에 반성하며 대학로를 찾았는데요. 연극을 보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우모가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냄새' 때문입니다. 소규모 연극인 경우 고작 20~30명을 앞에 두고 공연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바로 1m 앞에서 실감나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배역이 아닌 배우의 열정에 더 감동받게 되더군요. 열악한 현실에서도 열정 하나로 연기에 몰두하는 모습은, 남대문시장에서 받는 삶에 대한 강한 체취와 유사합니다. 이에 반해 뮤지컬은 좀 다르죠. 뮤지컬도 배우의 열정이 숨쉬긴 하지만, 관객과의 거리감이 어느 정도 확보된 상태에서 연기하기에 감동의 농도는 연극에 못미칩니다. 그래서 우모는 왠지 배우와 하나되는 느낌의 연극을 좋아합니다.

연극 '마리화나 2008'은 대학로 어느 외진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더군요. 찾기 쉽지 않았습니다. 위로는 고시원이 있는 허름한 건물 지하에 극장이 있더라구요. 너무 썰렁해서 '설마 이런데 극장이 있나?' 싶었습니다. 매표소도 단촐하구요. 따로 관객들이 대기하는 곳이 마땅치 않아 극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먼저 도착한 관객들끼리 그냥 옹기종기 서있었죠. 마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모여있는 펭귄들처럼... 게다가 난로마저 고장나서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안내요원이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하는데 기분나쁘기 보다는 '그래 이게 바로 연극이야' 하며 흐뭇해했죠. 만약 예술의 전당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면 당장 항의했을텐데, 그놈의 '사람냄새'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너무나도 너그러운 소비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복도 한켠에 놓인 중국음식 빈 그릇까지도 이뻐보이더군요.


연극 '마리화나 2008'은 대학로에서 꽤 인기있는 작품입니다. 오달수와 서주희의 출연도 그렇지만,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한 충실한 대본 덕분인데요. 기대에 어긋남 없는 유쾌한 2시간이었네요. '마리화나 2008'을 분석하면 역사적 사실, 즉 팩트에 덧붙여진 픽션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문종이 세자였던 시절, 문종의 두번째 부인 봉빈이 소쌍, 단지라는 나인과 삼각관계이자 동성애 관계였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퇴위당한 사건이구요. 픽션은 세자, 봉빈, 소쌍, 단지, 석가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용보, 부귀라는 허구인물을 내세워 관계를 더욱 복잡하고, 음란하면서도, 재밌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연극은 리뷰하기도 벅찰만큼 난삽하게 꼬여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삼각관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7명은 모두 연관되어 있죠. 칠각관계라고 해도 될만큼 서로를 속이며, 아니 은밀하게 본능을 해소해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실타래처럼 얽힌 관계를 풀지 못하자, 마지막에 세자가 '떼로 하면 어떨까?' 하는 화두를 던지며 끝을 맺습니다. 유교의 본고장 조선시대의 궁궐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결론인 셈이죠. 

연극은 인간에게는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이 있다는걸 보여줍니다. 본능이 억제되어 있는 가장 극적인 공간으로 궁궐을 내세웠구요. 본능이 거세되어버린 환관과 나인들을 그 상징인물로 등장시켰습니다. 하지만 연극의 전반적인 해학이 외설스러움을 보다듬어서 부담스럽지는 않네요. 오달수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왜 그가 대배우인가를 말해주고요. 차순배의 여장연기도 볼 만 했습니다. 양보람과 채국희, 조승연의 감초연기도 괜챦았네요. 기대했던 서주희는 발성이 약간 약하지 않나 싶었는데, 와이프는 괜챦았다고 하네요. 관점의 차이인가 봅니다. 그리고 김영철의 대사에서 NG가 나왔는데 덕분에 더 크게 웃었네요. 주변 배우들의 애드립으로 무난하게 넘어갔는데 역시 배우는 센스가 필수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대학로로 나왔는데 엄청 춥더군요. 늦은 시간이었지만 떡볶기까지 먹고 왔습니다. 깻잎 떡볶기라고 나름 유명한 집이더군요. 맛은 뭐 늘 그렇듯 뭐든 다 맛있습니다.^^ 정말 간만에 연극을 보니 다시 예전 대학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더군요. 소원했던 와이프와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구요. 무엇보다 잃어버렸던 감수성을 찾았다는 점이 행복하게 하네요. 조만간 다른 연극도 시간을 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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