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긴 읽어야 하는데 읽지 못한 고전, '단테의 신곡'을 숙제하듯 읽어냈다. 예상했던대로 '단테의 신곡'은 중세시대에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분히 기독교를 위한, 기독교에 의한, 중세 기독교의 책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자신을 위로하며 응원하는 장치가 숨어있다고 할까?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를 배치한 것도 그 중 하나다.

 

'단테의 신곡'은 몇 가지 측면에서 센세이셔널하다. 우선 작가가 직접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런 형식이 '단테의 신곡' 이전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획기적인 구성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이 소설은 지옥과 연옥, 천국에 처한 사람의 실명이 언급되는 상당히 정치적인 책이다. 단테의 의도에 따라 자신과 자신이 속한 정파와 친척들은 미화되고 반대쪽 인물들은 악으로 규정된다. 단순한 소설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무서울 정도로 단순화되는 선과 악의 구분은 지금까지도 서방세계 가치관에 녹아있다.

 

 

동시에 이 책은 지배계층에 종교적 정당성을 제공한다. 농노에게는 귀족을 향한, 왕과 귀족에게는 교황과 성직자를 향한 존경과 순종을 강요한다. 이를 거부할 경우 무시무시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는 매우 효과적으로 먹혀들었다. 일종의 공포 마케팅인 셈이다. 현실세계의 불만을 사후세계의 안녕으로 잠재울 수 있다는 것, 나아가 현실세계의 충직한 복종을 이끌어낸다는 건 종교가 아니고선 불가능에 가깝다.

 

돌아 보면 묵직한 종교의 힘은 당대 황제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마교황인 그레고리우스 7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을 내린 카노사의 굴욕도 중세라면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 아무리 황제라 한들 사후에 지옥으로 떨어진다는데 어찌 눈밭에 서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의문을 해소하는데 상당한 부분을 할애한다. 예수 강림 이전의 사람들이 죽으면 천국에 가는지 지옥으로 가는지, 심지어 아담이 왜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지 등에 대해 풀어주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얼마 전 앙코르와트 벽면에서 봤던 지옥의 모습이 머릿 속에 맴돌았다. 혀를 뽑고, 유리가루에 짓이기는 등 불교와 힌두교에서 그린 지옥 역시 서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공포 마케팅을 쓰는 통치방식 역시 비슷했다. 동양과 서양은 그렇게 그렇게 근대에 이르렀으며 점점 종교의 그늘에서 벗어난 셈이다.

 

책을 덮으며 덧붙인다면, 드러나지 않았을 때 가장 극대화되는 공포심을 이겨내는 방법은 과연 있을지, 인간에게 사후세계는 과연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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