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는 묘한 매력이 있다. 영화는 대사의 힘으로 끌고 나가면서 카메라의 역할을 굉장히 제한적으로 배치한다. 그런데 그 투박한 카메라가 주는 맛이 뭔가 상징적이라고 할까? 압축적으로 전달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는 안개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 배경인 남한산성의 안개처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생활의 발견'과 비슷하다. 어딘지 불안한 남녀관계를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본다. 영화 내내 그렇다. 딱히 줄거리랄 것도 없다. 당연히 결론도 애매하다. 누군가 술자리에서나 얘기했음직한 그런 평범한 이야기를 영상에 담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어떤 영화였는지 생각해 보면 딱히 떠오르는 이야기는 없다. 그냥 이미지만 남는다. 대사는 감칠맛 난다. 세련된 감치미는 아니지만 그냥 잔잔한 그러나 너무 일상적이어서 또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는 모두 유부남을 사랑한다. 정은채도 그렇고 예지원도 그렇다. 어쩌면 그런 처지라 동변상련의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둘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을 소유하긴 어렵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남한산성과 비슷하다. 사랑은 하지만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일정 부분 숨기고픈 안개 속 사랑이다. 정은채는 엄마의 캐나다 이민으로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되고 사랑에 대해 실체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의 결심이 교수에겐 부담이 되고 결국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만다. 반면 7년간 유부남과 사랑해 온 예지원은 그런 처지를 아쉬워하면서도 막상 그 연을 끊지 못한다. 결국 평범한 행복은 갖기 어렵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여자 이미지는 대개 이러하다. 


반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이선균, 유준상은 현실적이다. 가정과 사랑 모두를 지키고 싶어 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버릴 생각이 없다. 가끔씩 그런 일상을 탓할 뿐,  그걸 깰 용기도 없다. 그래서 자신과 은밀한 관계 속에 머물러 있던 정은채가 관계정리를 요구했을 때, 그는 당혹감에 목놓아 울었던 것이다. 어떤 것도 스스로 깰 수 없는 상황에서 깨질 수 밖에 없는 현실에 그는 무기력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선균은 이중적인 욕망도 한껏 드러낸다. 정은채가 다른 남자와 사귀었던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막상 정은채가 두사람의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땐 극도의 분노를 폭발시킨다. 사랑에 대한 독점욕과 교수직에 대한 명예욕과 가정유지라는 현실적인 생활욕을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성인들을 위한 성장통 영화 같은 느낌이다. 성장통이 사춘기에만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듯 하지만, 사실 연습 없는 인생은 늘 몸으로 부딪치며 깨달으며 살 수 밖에 없는 법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사랑이 없을 것 같은 나이에 사랑은 찾아오고, 이별은 생각지도 않게 닥치게 된다.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영화도 그런 사랑을 관조적으로 보여줄 뿐 어떤 결론도 내놓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은 현실과 꿈의 애매한 경계선에 서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영화 마지막 꿈에서 깨어난 정은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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