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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고른 책이 꽤 괜챦은 내용일 때 마치 잔디밭을 걷다 네잎 클로버를 발견한 듯한 느낌인데요. <굿바이 클래식>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케이스네요. 주위에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한번 읽어들 보시지요.^^


이 책은 클래식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은 비서구권, 특히 한국에서의 서양문물 권력화에 대한 냉철한 비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 뿐만 아니라 폭넓은 이야기를 담고 있죠.

서양 제국주의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두가지의 문화도구를 퍼뜨렸는데요. 하나가 기독교(찬송가)이고 또 하나가 의학이죠.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외부 문물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이 두가지 무기가 각각 음악과 의학분야에서 독보적인 정서권력과 생체권력을 차지하게 되었구요. 더 나아가 국내에서 스스로 그 영향력을 확대재생산하며 하나의 이데올로기로까지 기능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생체권력이라는 용어는 미셸푸코가 서양의학이 식민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로 정의를 내렸다네요.

하지만 정작 서양에서는 두가지 모두 절대권좌에서 물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클래식이라 불리우는 서양고전음악은 링거로 연명하고 있는 상태인데요. 예쁜 음악만을 추구하는 서양고전음악은 현대에 들어와 한계에 부닺쳤다고 저자는 진단합니다. 물론 저자의 개인적인 평가입니다만,누군가 해야 할 말을 콕 집어 한 듯한 느낌이더군요.

이런 서양음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뮤지션들이 혁신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서양악기의 속성상 음악다운 음악을 구현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플륫과 대금을 비교했는데요. 플륫은 기껏 불어봐야 400m 정도 퍼지기도 힘든데, 대금은 10리, 즉 4km를 퍼진다고 하네요. 이렇게 될 수 있는건 대금이 갈대의 속청으로 만든 청공(淸孔)이란게 있어 위력적인 사운드를 내기 때문이구요. 물론 멀리 퍼지는 소리의 힘이 악기를 평가하는 주요인은 아니지만, 이런 속성 때문에 한국음악은 자연에 더 가깝고 자연속에서 훨씬 더 매력적으로 들리게 됩니다.

이 역시 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한국음악이 우월하다고 말하는건 아니겠죠. 하지만 적어도 한국전통음악에 대해서 모르고 있던 부분, 그리고 애써 부정해왔던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국 음악계는 이런 조류에 민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적입니다. 서양고전음악을 음악의 중심으로 놓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대학교육도 서양고전음악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고 그 외의 음악은 부수적인 분야로 취급당하고 있죠. 저자는 이런 현상을 기득권 고수, 고액과외를 위한 카르텔 등으로 풀고 있는데요. 상당히 공감가는 바가 많습니다.

책에서 한가지 재미난 비유를 하네요. 허스키 이야기인데요. 얘기인 즉슨 이렇습니다.

캐나다에 허스키라는 개가 있는데요. 캐나다 사람들은 개의 습성이나 생김새 등을 고려할 때 허스키를 명견으로 자부하고 있답니다. 이걸 본 한국사람이 크게 깨달아 한국의 진돗개는 명견이 아니구나, 똥개구나 하고 스스로 격하시킨거죠. 그래서 그 한국사람은 한국으로 돌아가 허스키를 키우고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허스키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생겼을 무렵 다시 캐나다로 갔는데, 여기서 또 한번 충격을 받습니다. 캐나다 사람들이 허스키를 수많은 개의 한 종으로 취급해 진돗개, 풍산개 등과 동등한 위치로 평가하고 있었거든요. 캐나다 사람들은 개는 개일 뿐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거죠.

이에 한국사람은 개탄합니다. 어떻게 명견 허스키를 저렇게 몰라줄 수 있는가 하면서 오히려 분개합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 타락한 캐나다 사람을 탓하며 더욱 허스키 숭배에 빠지게 되죠. 결국 캐나다에 없는 허스키 숭배사상이 한국에서 오히려 만연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뭔가 뒤통수에 망치로 맞은 듯한 느낌 혹시 안드시나요? 이게 허스키나 음악만의 얘기가 아니라, 종교, 정치, 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심한 작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은 클래식 천동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합니다. 아니 이미 클래식을 중심으로 음악계가 움직인다는 천동설은 서양에서 이미 소멸했는데도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천동설에 머물러 있다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음악을 음악으로 보는 지동설로의 전환을 주장합니다. 그래야 클래식 울렁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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