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카고의 파고다공원

햇살이 따사로운 미국 시카고의 어느 대학교 도서관. S는 졸업논문과 씨름하고 있다. 지난 캘리포니아 방문 때 수집했던 자료를 마무리 하는게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다소 심각한 얼굴로 분주히 자판만 두들기고 있다. 며칠 전 지도교수 K가 보강하라고 지적한 내용을 고민하지만 진척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짜증이 났다. ‘젠장 논문 쓰기 힘드네~ 내가 왜 여기 와서 이 고생일까?’ 잠시 노트북을 덮는다. 그리고 머리도 식힐 겸 녹차 머그컵 집어 들고 도서관 밖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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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뒤쪽으로 5분쯤 걸어가면 이 학교 설립자 동상이 우두커니 서있는 공터가 있다. S가 답답할 때 바람을 쐬러 자주 찾는 곳이다. S가 이 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수려한 풍경도 좋지만 또래의 한국 유학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알아준다고, 30~40대의 고참 유학생들만의 애환을 나눌 공간은 필요했으리라. 그래서 늙다리들만 모이는 이 공터를 한국 유학생 사회에서는 파고다공원이라 부른다.

파고다공원에는 마침 K방송사의 J국장과 C일보의 W기자가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S는 반가웠다. 이 들과는 가족을 데리고 늦으막에 유학을 왔다는 공통점으로 사석에서 곧잘 어울리곤 했다. 특히 W기자는 올 초 시카고에 처음 왔을 때 S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S : “다들 바쁘지는 않은가봐? 여기서 소일하고 있는거 보면?”
J : “어서 와~ 우리도 막 여기서 만난거야”
W : “어떻게 논문은 잘되어가나?”
S : “글쎄 잘 되는건지 원~ 그냥 휘갈기고 있어 나도 늙었나봐. 아무 생각도 안나.”
W : “귀국이 언제라 그랬지?”
S : “논문 통과되면 다음달 27일… 거의 3년만이지”
J : “그래? 자칫 잘못하면 W랑 같이 귀국하겠구만.”
S : “아니 왜?”
W : “……”



2. W에게 온 전화

W는 할말은 한다는 신문사에서 15년 기자생활을 했다. C일보는 정치분야에서 워낙 막강한 입김을 자랑하는지라 그런대로 W도 만족스러운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청와대를 비롯해서 정당, 검찰청 등 요직이라는 요직은 다 거쳤다. 나름 인정도 받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불현듯 유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열심히 살아온 세월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기도 했고, 지난번 미국 특파원 지원에 떨어진 한을 풀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판매부수는 물론이고 광고 매출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5대 포털의 광고시장 규모가 이미 신문사 전체의 광고매출을 추월했을 뿐만 아니라 구글의 애드센스와 같은 1인 미디어 광고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 결정타가 되고 말았다. 신문 광고시장은 어딜 가도 찬밥신세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작년 매출이 한창 잘나갔을 때의 67% 수준이란 얘기가 들렸다. 물론 직원 수는 2.3배가 증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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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는 이런 회사의 사정을 뻔히 아는지라 유학자금 지원을 요청할 수 없었다. 불과 3~4년전만 해도 회사돈으로 유학가는건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동료들은 한술 더 뜬다. 이런 분위기에서 휴직은 구조조정 1순위라나 뭐라나... 하지만 W는 오랜 기러기 아빠 생활로 지쳐있었기에 어떻게든 미국에서 가족과 합치길 원했다. 결국 그는 자비로 비행기를 탔다. 회사에서는 지원해주는 것이 한 푼도 없지만 그래도 해고 대신 무급휴가라도 준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런 W에게 어제 아침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고향 직속후배인 L기자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시작한 통화는 이내 우울한 소식이 되고 말았다.

L : “W선배, 저 L입니다.”
W : “아이고 이게 누구야. 경제부에 잘나가는 L기자 아니신가?”
L : “예, 잘 지내시죠?”
W : “그럼 잘 지내지, 더워서 힘들긴 해도, 거기 태풍피해 크다더니 괜챦나?”

중략

L : “아 선배 혹시 회사 얘기 못들었죠?”
W : “엉… 특별한 얘긴 들은게 없는데 왜?”
L : “아마 곧 통지가 갈텐데, 우리 회사 넘어가요.”
W : “뭐라고? 넘어가? 어디로?”
L : “놀라시겠지만 Q라고 컨텐츠 컴퍼니 아시죠? 홍콩에 아시아지부가 있는…”
W : “엉 알지. 설마, 그 놈들이?”
L : “거기서 인수해요. 말로는 지분만 가져가고 경영권은 남긴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경영권까지 다 가져간다는 말도 돌던데요.”
W : “………”


W는 순간 말을 잃었다. Q 컨텐츠 컴퍼니라면 부실 신문사를 인수해서 기반을 다지고 잡지사, 방송사를 먹어 치우는 기업사냥꾼으로 유명한 다국적 기업이다. 게다가 ,Q에 인수된 기업은 대개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대량 실업사태를 야기하곤 했다. 그런 Q 컨텐츠 컴퍼니가 한국에 온다는 얘기는 있었지만, 그 첫 대상이 C일보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W의 한숨이 깊어만 갔다.



※ 이 글은 우모가 <방송환경의 변화와 미래>의 기말 레포트로 작성한 <미디어 오딧세이, 2017>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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